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진 Aug 06. 2017

너에게 마음이 쓰여.

관계의 미감(味感)

'내일 만나자.'


친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울 때가 있었다. 해가 저만치 멀어지면 하루의 대화가 쌓여 책가방과 함께 덜거덕 소리를 낼 때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가 혹시 친구에게 상처를 주진 않았을지, 나의 작은 머뭇거림이 우리 사이를 흔들어놓았을까 고민하며 16동 아파트 관리실을 지났다.


13층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우리 집에서는 향기가 났다. 엘리베이터에 내려 문에 가까워질수록 향은 짙어졌다. 매미가 울부짖는 한여름에 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아파트 복도가 우리 집 같았다. 바람이 지날 때마다 옆 동으로 향기가 건너갔다. 책가방을 내려놓으면 한껏 무거워진 하루의 기억도 조금 가벼워졌다.


우리 가족은 풀을 좋아했다. 엄마는 아침마다 잎을 하나씩 닦으며 화초와 대화를 나누었다. 조금 시든 화분은 볕이 더 잘 드는 베란다를 차지했다. 일 년 내내 푸른빛을 뽐내는 건강한 아이들은 현관 밖에서 나를 맞곤 했다. 후덥지근한 공기를 뚫고 장마가 시작되면 향기는 더욱 진해졌다. 생명을 품고 있던 흙이 물을 만나 진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그 옆에서 내가 낮잠이라도 자면 꿈에서 내가 풀이 되었다.



밤에 이불을 덮고 천장을 바라볼 때마다 누군가가 떠오른다. 아무 일도 아닌 척했지만 이제야 마음이 쓰이는 사람, 조금 더 친절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 못내 미안한 사람, 옆에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을 계속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 몽글몽글 솟아오른다. 내일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말했어야지 이제 소용없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잠이 든다.


바질, 오레가노, 민트와 같은 허브는 제 때 물을 못 주거나 햇빛이 충분하지 않으면 쉽게 시들하다 말라죽고 만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적당량의 수분과 바람, 일조량을 체크해야 한다. 한낮에 쏟아지는 빗줄기가 반가울 때도 있지만 거센 바람에 흙이 쓸려가진 않을까 마음을 써야 한다. 밤이 되면 온도가 너무 떨어져 흙이 얼지는 않을지 신경이 쓰인다. 필요할 때 손길을 주지 못해도 쑥쑥 잘 크는 허브를 볼 때마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일주일에 두 번, 잎을 똑똑 따서 샐러드에 버무리거나 반찬에 얹어서 밥상에 내놓는다. 미처 스며들지 못한 물방울이 아직 잎에 맺혀 있다.




마음에 남아 있는 친구를 초대해서 함께 밥을 먹는다. 화려하고 맛난 요리가 가득한 거리를 옆에 두고 소박한 한 상을 차려낸다.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낸다. 13층 우리 집 한낮의 베란다 냄새가 다시 나기 시작한다.


해가 넘어가고 우리의 대화가 다시 가벼워질 무렵 허브에 물을 줘야 한다. 이제는 무거워진 책가방 대신 한껏 부푼 마음이 빙긋 웃는다. 길어진 그림자를 밟고 허브와 화초와 버섯이 향기를 뿜는다. 길었던 대화에 마침표를 찍고 반갑게 인사한다.


'안녕, 내일 보자.'



작가의 이전글 그리는 삶과 그리는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