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의 아침을 기록하다.
'나에게 내일의 태양은 없을 거야.'
오늘 뜨는 해가 우리에게 마지막일지 모른다. 붉게 일그러진 태양이 만들어낸 일출을 굳이 보려 하지 않아도 우리는 매일 아침을 만났다. 어느 특별한 아침의 기억은 하루를 만들고 어제를 만들고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오늘 뭐 하고 싶어?'
아침 햇빛이 유난히 따가운 날이 있었다. 제주도의 해는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다. 유리창에 반사되는 빛이 화음을 만들듯 각기 다른 색을 만들었다. 햇빛보다 뜨거운 티를 마시며 조용히 아침을 맞았다. 아무 계획도 없이 떠난 여행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이 많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꼭꼭 채워졌다.
'어디부터 하늘인지 모르겠어.'
특별한 장소에서 잠을 자면 아침이 기대된다. 눈을 뜨고 여기가 어딘지 잠시 현실감각을 잃었을 때 평행봉에 서 있는 어린아이 같은 기분이 든다. 찰싹찰싹 바닷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소금내나는 베개를 잠시 끌어안고 있다가 산책을 나갔다.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 대신 부드러운 파도가 발목에 감기는 것을 느끼며 걸었다. 아침 해가 구름 뒤에 숨어 잔잔히 빛이 번졌다.
기대하던 일출을 보지 못했을 때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라고 생각했다. 짧은 휴가는 일출을 기다리는 여유를 허락하진 않았지만 추억을 흐리지는 못했다. 아름다운 일출보다 옆사람과 웃을 수 있는 여유가 더 좋다.
누구보다 일찍 아침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일상에 침범한 조용한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그저 폐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들보다 낮은 자리에서 가만히 머물다가 떠났다. 우리 모두 그런 운명이 아닌가.
여행지의 아침엔 더 배가 고프다. 누군가가 차려주는 아침밥이 그리울 때 여행을 떠났다. 항상 먹는 커피보다 더 연하고 항상 먹는 빵보다 조금 부드러웠다. 누군가 부엌에서 나를 위한 아침밥을 차려주는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
낯설지만 익숙한 얼굴이 있는 친구 집은 우리 집처럼 편안했다. 햇살만큼 밝은 미소, 입천장이 까지도록 고소한 바게트, 녹녹한 버터가 어우러진 따뜻한 아침을 맞았다. 노르망디의 공기는 차가운 기운을 가득 품고 무거웠지만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저 친구라서 받은 배려 덕분에 매일 아침이 명랑했다.
'왜 그때 그 식빵이 그렇게 맛있었을까.'
유명하다는 맛집은 무조건 가보고 새로 문연 빵집엔 눈도장을 찍어야만 하는 우리가 가끔 말이 끊길 때마다 생각나는 곳이 있다.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지겨운 업무에 숨이 막힐 무렵 도망치듯 떠난 한 게스트하우스의 소박한 아침식사가 떠오른다. 눈이 부셔서 보고 있던 책을 덮었지만 빛을 가리는 대신 친구의 얼굴을 보며 밥을 먹었다. 다음 날 일찍 비행기를 타느라 빵을 한번 더 못 먹은 게 못내 두고두고 아쉽다.
솔직히 가기 싫었다.
헤어진 남자 친구와 갔던 곳을 다시 가기 싫은 마음으로 제주도를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약속은 정해졌고 다들 기대하고 있었다. 뾰로통한 마음을 안고 한라산도 올랐다. 아무리 예쁜 풍경이 나와도 일부러 시무룩했다. 하지만 아침마다 쨍하고 개는 날씨를 보고도 웃지 않을 순 없었다. 눈을 뜨자마자 에스프레소를 내려 한 손에 쥐고 한 손에 담배를 물고 있던 그녀가 떠오른다. 여행은 같은 곳을 가더라도 새로운 경험을 선물한다. 어렸을 때 밤새서 읽었던 '제인 에어'를 최근 다시 읽었을 때 기분과 비슷하다.
'나 라면 안 좋아해.'
딱 잘라 말하는 나의 입으로 마카로니가 술술 들어왔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토마토가 둥둥 떠 있고 향신료가 섞인 소시지와 기름범벅인 계란 프라이가 한데 뭉쳐있었다. 더 이상 달게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밀크티가 커피 대신 내 잠을 깨웠다. 윙윙대는 파리와 아침 쓰레기와 정신없는 사람들 수다에 묻혀 아침을 맞았다. 내가 겪는 풍경이 이 한 그릇에 담겼다.
구멍 한 개가 작다고 두 개를 뚫었다. 바싹 구운 토스트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탄 내가 날 정도로 구웠단다. 식빵 귀퉁이를 작게 잘라 노른자에 퐁당 담가 먹었다. 커피 한 모금과 샐러드 한 조각. 일상이 또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