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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Aug 17. 2017

떼를 쓰자

세상을 향해 떼 쓰기

어쩌다 보니 '쓰다'에 대해 세 번째 글을 쓰고 있습니다. 마음 쓰다, 아침을 쓰다 그리고 떼를 쓰다. 신기하게 쓰다에 대해 쓸수록 글 쓰는 부담이 조금씩 줄어듭니다. 내용이 점점 가벼워지고 있으니 다이어트하는 기분이 드네요.


근처 코스트코에 장을 보러 갔다. 갓 구운 닭고기와 빵, 치즈 냄새를 맡으면 엄마 집에서 저녁밥을 기다리는 아이가 되곤 한다. 블루베리 시리얼과 오트밀의 칼로리를 비교하고 있는데 아이 울음소리를 들었다. 엄마에게 뭘 사달라고 조르는지 징징 울고 있었다.


넓은 코스트코에 메아리를 만들며 울고 있는 아이의 사정이 궁금했다. 대체 뭘 사달라고 하는 걸까. 아이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이는 이불과 옷 같은 폭신한 것들이 잔뜩 쌓여있는 정중앙에서 몸을 굴리며 울고 있었다. 한 손에는 자기 몸보다 큰 회색빛 곰인형을 들고 계속 흔들고 있었다. 인형은 한눈에 봐도 조잡해 보인다고 할까, 별로 품질이 좋지는 않았다. 제주도 테디베어 박물관에서 데려온 내 곰인형 몽쉘이의 촘촘한 박음질과 비교하면 썩 좋지 않았다. 아이 엄마도 같은 생각인지 연신 거절의 몸짓을 하고 있었다. 무시하기로 마음먹고 등을 돌린 채 다른 쇼핑에 몰두하는 척하며 아이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허브 코헨의 <협상의 법칙>에 의하면 꽤 괜찮은 전략인 셈이다. 아이가 지쳐서 울음을 그칠 때까지 엄마의 승리 쪽으로 바늘이 기울었다. 아이는 엄마가 저만치 멀어지자 울음을 멈추고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렇지 않게 인형을 다시 매대에 올려놓고 쫑쫑 따라갔다. 엄마의 완벽한 승리다.


나는 다시 시리얼 쪽으로 돌아갔고 조금 있다가 티라미슈와 연어 중에 무엇을 제외할지 고민하며 계산대 줄에 섰다. 회색 곰인형을 좋아하는 아이와 엄마도 옆 계산대에서 물건을 올려놓고 있었다. 잠시 사라진 아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난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곧 아이는 의기양양하게 못생긴 회색 곰인형을 안고 유유히 코스트코를 빠져나갔다. 응? 어떻게?


알고 보니 계산대에 엄마가 물건을 올려놓는 데에 집중하는 동안 아이가 재빨리 인형을 다시 집어와서 계산대 위에 턱 올려놓은 것이다. 엄마가 아이의 철없는 행동을 나무라자 계산대 직원 세 명이 아이의 편을 들었다. 뭐, 이왕 더 많이 사게 하는 게 회사 매출에도 좋고 아이 편을 드는 게 세상의 정의에 더 가깝다는 판단을 한 것일까. 1:4의 대결에 엄마는 더 싸울 시간이 없는지 바로 백기를 들었다. $19.99+Tax를 지불하고 아이는 목적을 이뤘다. 물론 엉성한 바느질과 빠지는 털 때문에 아이는 며칠 만에 인형을 버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저렇게 쉽게 원하는 목적을 이루는 모습을 보니 떼쓰는 아이를 마냥 어리다고 무시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떼를 써서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한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우선 목적이 뚜렷해야 한다. 목적이 명확하지 않고 그냥 떼를 쓰면 엉덩이만 더 맞는다. 또, 1:1 거래가 아닌 협상의 전략으로 사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아이가 '곰인형을 사주시는 대신 제가 오늘 설거지를 하죠.' 같은 협상을 하려 드는 건 떼쓰는 것과는 다르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무언가를 간절히 바랄 때 아이는 일단 바닥에 눕는다. 그리고 다리를 구르며 큰 소리로 운다.


코스트코에서 자지러지게 울던 아이가 추가로 선택한 전략은 지지자를 끌어모아서 내 편을 늘리는 방법이었다. 슈렉에 나오는 장화 신은 고양이가 큰 눈을 꿈뻑이면 안 넘어갈 사람이 없는 것처럼 아이가 울음을 그치고 빤히 바라보면 져주지 않을 어른이 어디 있을까. 계산대의 덩치 큰 이모 세 명의 인상을 보는 순간 아이는 느꼈을 거다. '아 오늘은 나의 승리구나.'


과자 내놔... 아니 까까 사주떼엽


문득 내가 마지막 떼를 썼던 기억을 더듬어봤다. 갖고 싶었던 미미인형을 사달라고 엄마에게 졸랐던지 아니면 시장 떡볶이와 튀김 냄새에 홀딱 넘어가 사달라고 마냥 울었는지 가물가물하지만 단호한 거절을 학습한 덕분에 나이가 조금 먹은 후엔 떼를 썼던 기억이 없다.


그리고 점점 당장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추구할 여유가 없어졌다. 아이가 성인이 되면서 눈앞의 이익에 당장 휘둘리지 않아야 칭찬받고 내 것을 포기하고 더 큰 선의를 위해 참을 줄 알아야 어른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래서 겉으로 좋아하는 티도, 싫어하는 티도 내지 않고 눈앞에 맛있는 음식이 유혹해도 점잖게 앉아 있는다. 유명한 '마시멜로 실험'에서 성공한 사람일수록 행복 지연 능력이 높았다는 결과가 이런 현상을 더 부추기진 않았을까. 떼쓰지 않는 어른이 많을수록 사회는 안정된다.


그리고 정말 원하는 게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먼저 생각한다. 차를 사려면 용돈을 얼마나 줄여야 하는지, 여행을 가기 위해 마이너스 통장을 어디까지 쓸 수 있을까 고민하기도 하고 부모님의 설득을 거절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갈등을 어디까지 감내해야 하는지 계산하기도 한다. 그저 하고 싶다고 무작정 시작하는 사람은 충동적인 사람, 어린이 같은 사람, 비성숙한 사람으로 보인다.


당연히 미래의 고통을 먼저 생각해 조금 더 현실적인 이익을 찾아가는 행동은 매우 합리적이다. 문제는 이 대가 때문에 자연스러운 욕구를 알아서 포기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점이다.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참으면 두 배로 먹을 수 있다고 해도, 또 선택에 따른 결과를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가끔은 당장 먹고 싶을 때가 있다. 아이들은 그래서 떼를 쓴다. 지금 먹고 나중에 또 먹으려고.


이제 엄마보다 내가 키도 더 크고 돈도 번다. 떼를 써야 할 대상이 바뀌었다. 나에게 점잖으라 강요하는 사회에게 원하는 일 당장 하고 싶다고, 좋아하는 친구와 당장 사귀겠다고, 시도하고 싶은 건 당장 저지르겠다고 떼를 쓰고 싶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에이, 참 귀찮게 구네. 그냥 이거 먹고 떨어져.'라고 선뜻 원하는 걸 손에 얻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야심차게 수영하러 갔다가 물이 차가워 못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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