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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효선 Jun 30. 2022

언제 썼는지 모를 일기

풀어내서 어딘가에 담아 나도 모르는 곳에 묻기

2018년도부터 감사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확실히 삶이 더욱 좋은 쪽으로 변화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지금이 그때와 크게 변하지 않은 삶일지 몰라도 마음이 좀 더 풍요로워진 것 같다. 당시 산소호흡기처럼 의존하던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여름엔 찜통, 겨울엔 입김이 나오는 창고 같은 단칸방에 살면서 감사의 마음을 갖기란 쉽지 않았다. 도무지 무엇에 감사하라는 건지 떠오르지도 않았고 억울하고 짜증이 났다. 내가 누리는 모든 것에 대해, 누린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살아있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얻는 것들이 많았다. 일단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보고, 듣고, 맛을 보고,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만 보고 들을 수는 없지만. 좋고, 싫음. 옳고, 그름. 착하고 나쁨.


요즘 소중한 사람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좋은 곳이 있으면 같이 가고 싶고, 맛있는 것이 있으면 같이 먹고 싶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같이 보고 싶고, 좋은 것을 알면 알려주고 싶은 그런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이를 먹고 아무리 많이 배워도 인간의 미숙함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형태는 바뀌는 것 같다. 다른 모양으로, 좀 작아지기도 하고. 나는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 알면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 몰라서 했던 잘못된 행동을 고칠 수 있다. 살면서 참 많은 기회가 있다. 이미 했던 잘못이나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사과하고 배워서 다시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기회가. 나는 그 과정을 좋아하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서, 아니면 너무 어려울 거 같아서 지레 포기한 적이 많았다. 그래도, 여전히 기회가 남아있음에 감사하다. 다르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찐 인프피인 나는 신념을 중시한다. 직업을 선택할 때 돈이 1순위가 아니다. 돈은 좀 적게 벌더라도 의미가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 기분이 좋다. 그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외로움을 잘 타고 공허함도 자주 느낀다. 기준이 높다면 높은 것일 수도 있고, 취향 자체가 남다른 것일 수도 있다. 따뜻한 가치관을 갖고 사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심약한 성격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돈이 중요한 가치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에 가치를 높게 두기 때문에.


어렸을 때 살아갈 힘을 많이 모아두지 못했다. 자주 괴롭고 슬프고 힘들지만 적어도 지금은 누가 일부러 나를 괴롭히거나 못살게 굴지는 않는다. 웬만하면 힘들고 어려운 일은 나에게 닥치지 않았으면 하지만 내 맘대로 될 수 없다. 좋아하던 친구가 자살을 하는 것도 막을 수가 없었다. 내가 길고양이 간식을 챙겨주다가 자동차에 깔리는 사고도.

그런 끔찍한 사건들이 만연해있는 세상이라고 생각하면 살기가 무섭고 힘들고 어렵게 느껴진다. 그래도 별 수 있나. 살아가야지. 일은 그렇게 제멋대로 일어나는 걸. 그러니까 나도 내 멋대로 살아야지.


마음껏 우울해도 되는 직업을 갖고 싶다. 마음껏 우울하고 억지로 웃는 표정 안 지어도 되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커피와 빵을 먹으며 한참을 멍 때리다가 한 줄 쓰고. 느낌 오면 쉬지 않고 몇 시간을 쓰고… 아무런 표정을 지어도 되고. 하루 온종일 우울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하는… 그러면, 지금처럼 이 모든 걸 감당하느라 약을 먹지 않아도 될 텐데. 그냥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싶은 일 하며 살면 안 되는 걸까.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내가 매일 슬픈 기분을 느끼는 것도, 뭐 어떤 저주에 걸린 게 아니라,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진짜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행동에도 다 이유가 있다. 대부분 원해서 그러는 게 아닐 것이다. 도움이 필요할 뿐이지, 막 무슨 괴물을 본 것처럼 도망치거나 비난하거나 사회에서 매장당할 일은 아니라생각한다. 다 이유가 있는 거니까. 태어날 때부터 괴물로 태어난 사람은 없으니까.

밤낮 일어나지도 않을 일 때문에 두려워하느니 차라리 저질러보는 건 어떨까. 죽기밖에 더하겠어? 아니, 죽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 있다. 수치심. 죽음보다 견디기 힘든 고통. 그래서 자살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지도 모른다. 남들이 알면 안 되는 나의 치부. 못난 면. 나조차 받아들일 수 없는. 나를 낳은 부모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이해하지 못할 나의 치부. 그것을 들키는 것이, 받아들이는 것이 죽음보다 두려운 것이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짐작도 안 되는 그의 마음을 생각해본다. 그동안 사는 게 많이 힘들었나. 아니면 지쳤나. 아니면… 아니다. 자기 자신만이 알겠지. 나는 심리학과를 전공한 상담사지만 그 친구의 당시 심리를 예측할 수가 없다. 알고 싶었다. 지금도 궁금하고. 그렇지만 영원히 알 수 없겠지. 사람은 어릴 때 사랑받은 기억으로, 그 힘으로 살아간다는데. 그런 게 많이 없었나. 뭐가 많이 어려웠나… 아무리 사람마다 자기만의 비밀이 있다고 해도, 털어놓을 사람, 그 비밀을 알고 있는 단 한 사람만 있었어도 죽지 않았을 텐데.


내가 내년에 살아있으려면 올해 어떻게든 뭐라도 써내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삶… 지금은 몸도, 맘도 건강하지 못하다. 긍정과 감사로 나아지길 기대하지만, 쉽지가 않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한 번뿐인 삶. 그리고 시간. 나라는 존재가 남들에게 가십거리로 술안주로 씹히거나,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하는 그런 존재일지라도. 내 사람들에게만큼은 나도 소중하고, 죽는 순간까지 기억될 존재다. 누구나 그런 존재가 있기 마련이고,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원 없이 절망하고 원 없이 미워하고 미움 당해야 여기서 좀 벗어날 수 있을까. 정말 질릴 정도로 겪어봐야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걸까. 행복하고 싶은 게 결코 죄라거나 무리한 소원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누구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행복을 추구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불행을 추구하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생각… 어쨌든 모든 것은 다 내가 선택한 거니까.


숨기는 것이 생기면, 행복해질 수가 없다. 불편한 마음으로 행복해질 수는 없다. 거짓말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매 순간 당당하고 싶다. 그게 어렵다. 그게 어려운 이유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해받지 못할 것 같다. 존중받지도. 사람들의 의견은 각자 다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다. 중요한 건 숨기는 것이 생겼고, 불행하다는 것이다. 한번뿐인 인생, 고통에 몸부림치며 괴로워만 하다가 갈 순 없다. 하루, 하루 감사에 초점을 맞추자. 오늘도 감사한 일이 많다. 매일 있을 것이다. 그 사실만 기억하면 좋겠다. 사는 게 힘들다는 사실보다는 감사하다는 사실만을. 아, 그러면 사는 게 좀 편할 텐데.

가지치기를 좀 해야겠다. 엊그제 동생이 와서 방 청소를 도와줬는데… 자질구레한 게 많았다. 꼭 필요한 것만 있으면 되는데. 쓸모없는 것들을 줄일 필요가 있다. 가지치기, 그래야 남은 가지가 더 잘 자랄 수 있다. 욕심부리지 말자. 버릴 건 버려야 한다. 다 가지고 갈 수 없다. 너무 무겁다. 너무 무거우면, 빨리, 멀리 갈 수 없다. 움직이지 못하면 그 자리에 고인 채로 썩어버릴 것이다. 그렇다고 꼭 바삐 움직이며 살라는 것은 아니다. 가고 싶은 곳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려면 몸이 가벼운 편이 낫지 않겠는가.


정신과 의사 선생님에게 말했다.

“신나는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신나는 일이라는 것은 어떤 일일까? 연애하는 거겠지. 꿈꾸고 기대하는 일을 하는 것이겠지. 마음이 가득 차 있으면 다른 것이 들어오지 못한다. 일단 비워내자. 비우고, 비우고, 비우다 보면 간절히 바라는 그 일이 들어올 자리가 생기겠지.


마음껏 사랑하고 싶은데, 정말 마음껏 사랑하고 싶은데. 내가 아직 두려운 건지, 준비가 안된 건지, 누군가를 받아들일 공간이 없는 건지. 비워야 하는데. 정말로 사랑하고 싶다. 내가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사실은 나는 그럴 힘도, 내면에 사랑도 없고, 사실은 그런 번거롭고 귀찮은 거, 하기 싫은 건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추앙하는 그런 일 따위… 할 수 있는 힘이 내게는 없다고. 그런데 평생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너무 슬프니까. 그냥 지금은 그 힘을 키워가는 중이라고 생각하자.


이별이 힘들어서 인연을 맺고 싶지가 않은 것 같다. 잘해줄 자신도 없고 버려지는 느낌도 못 견디겠고 내가 버리는 것도 죄책감 들고 너무 힘들다. 원래 누군가를 만나기 전부터 나는 힘들고 우울했다. 곪고 곪은 고질병이다. 내 기질도 성격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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