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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들 Dec 06. 2019

세상에 고상한 취향은 없다.

취향에 관한 비공식적 고찰

취향으로도 갑질을 해대는 사람들이 간혹 있더라. 이런 게 더 낫다느니 저런 게 더 낫다느니 하면서 말이다. 차라리 단순하게 어떤 게 더 낫다고 ‘강추’하는 거라면, 백 번 양보해서 조금 나은 축에 속하는 꼰대라고 생각하고 넘어가 줄 수 있다. 하지만 “너 오타쿠야? 왜 영드나 미드 아니고 일드를 봐? 노래 목록에 이 일본 음악들은 뭐야 도대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나는 어떤 반응을 보였어야 하는 걸까?




벌써 10년도 훌-쩍 넘은 고등학교 때 이야기다. 당시 친했던 친구들이 일본어, 일본 드라마, 일본 음악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일본 문화를 비교적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영화를 좋아하는 아빠 덕분에 일본 영화 정도는 접해본 적 있었지만 그 외의 일본 문화들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친구들과 점심 시간이면 이어폰을 나눠끼고 운동장을 한 바퀴씩 돌면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자연스럽게 관심 가고 좋아하게 된 일본 가수와 드라마, 영화가 생겼다. 당시에는 mp3 말고도 인강을 보고 사전을 찾아볼 수 있는 pmp라는 것이 유행이었다. 나 또한 아빠를 졸라서 갖게 된 pmp 가 있었기에 좋아하는 일본 가수의 노래 몇 개, 공부하다 지칠 때 보고 싶은 일본 영화나 드라마 영상 몇 개를 넣어두고 다녔다. 그렇게 지내던 중 영어 회화 수업 시간에 앞자리에 앉은 반 친구가 사전을 빌리고 싶다고 했고, 별 생각 없이 pmp를 건네주었다. 10여 분 후, 그 친구는 선생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반 전체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목소리로 “야, 너 이거 뭐야? 너 오타쿠야? pmp에 일본 노래랑 드라마만 잔뜩이야. 너 오타쿠지? 맞지?”라며 나의 취향을 온 세상에 떠벌렸다.


오타쿠는 왜 한결같이, 늘 이런 외형으로 묘사되는 걸까? (원본: 웹툰 <프리드로우>)


여고에 다녔기 때문에 잘 보이고 싶은 남자애가 있어서 유독 부끄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내 취향이라며, 네가 뭔데 남의 pmp를 마음대로 뒤지고 훔쳐보냐며 큰소리 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지금처럼 ‘취향 존중’이라는 말이 버릇처럼 쓰일 때도 아니었고, 소위 ‘노는 애’ 축에 속하는 그 친구와 더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무시했다. 하지만 내가 선택했던 ‘무시’라는 답이 정답은 아니었나 보다. 그 친구는 대답 없이 자신을 흘겨봤던 나의 태도에 혼자 성이 났는지, 이후 마주칠 때마다 ‘오타쿠’라며 나를 놀려대고 함께 다니는 친구들과 함께 나와 내 취향을 비웃곤 했다.




비단 취향에 대한 주제 넘는 참견은 어린 시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이가 들고 사회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더욱 심해진다. 대학생일 때는 돈이 없어 여행을 자주 하지 못하는 것을 ‘여행을 별로 안 좋아해서’라고 포장한 적이 있었다. 나의 거짓말은 둘째 치더라도, 내 대답에 한 친구는 “엥? 젊을 때 여행 많이 다녀야지! 요즘 대학생 중에 유럽 정도 안 다녀온 애들 없을 걸? 너도 여행에 애정을 좀 쏟아봐. 여행 하면 얻을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한국은 너무 좁아서 국내 여행으로는 별로 볼 것도 없고… 여행 하려면 돈 좀 더 들어도 해외가 낫지.”라며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람의 취향에 대해 무례한 말을 퍼부었다. 한때 잠깐 사무직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한 사무실 직원분께서 “XX씨는 젊은 사람이 커피도 안 마시고, 술도 안 마시고 젊은 사람들 다 간다는 클럽도 안 다니고… 심심해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 성격이 내향적인 건 알겠는데, 사람 많은 곳에 가서 부대껴보기도 하고 클럽 같은 데 가서 젊음을 느껴보기도 해야지~ 너무 꽉 막혔네.”라며, 어이없는 말로 날 기가 막히게 한 적도 있었다.


내 취향이지, 네 취향이냐?


사람들은 가끔 말로 갑질하고 꼰대질 하는 것을 ‘조금 강한 권유’ 정도라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해보니 좋아서 너에게도 권하는 건데 뭐가 문제냐, 하는 식이다. 가끔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은 “내가 너보다 몇 십 년을 더 살아봐서 아는데, 너 지금 하는 그거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 시간만 낭비할 뿐이고 남는 건 없어!”라며 나이와 세월로 밀고 들어온다. 하지만 정말 말의 의도가 상대방을 아껴서, 상대방을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한 번 조심스럽게 권유한 후, 상대방이 싫어한다거나 꺼려한다면 타인에 대해 함부로 재단하거나 평가하거나 권유조차도 하지 않아야 한다. 특히 취향에 대해서는 더욱 더.


취향에는 절대적 기준이 없다. 상대적 기준만 있을 뿐이다. 나에게는 좋고 즐거운 것이 타인에게는 싫고 지루하고 마주하기조차 꺼려지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절대적으로 ‘고상한' 취향은 없다. 가치 판단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취향이라는 것인데, 어떤 취향이 고상한 것이고 어떤 취향이 막 되어 먹은 것인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굳이 ‘고상하다’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품위나 몸가짐의 수준이 높고 훌륭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장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품위’나 ‘몸가짐’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고상하다’라는 평가를 하는 것이지, 특정인의 취향이나 선호 등 개인적인 것, 객관적 평가가 불가능한 것에 대해 쓸 수 있는 표현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에 “쟤는 좀 저급한 취향을 가지고 있더라.”, “고상하지 못한 취향(혹은 취미)을 가지고 있네?”라며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타인의 취향을 재단하고 또 존중하지 않는다.




말로만 ‘취향 존중’을 외치는 것은 위선이다. 말과 행동이 함께 가야 변화가 오고 참된 의미의 ‘선’이 우리 앞에 도출될 수 있는 것이지, 말로는 좋은 것을 외치지만 행동은 그에 미치지 못하거나 정반대라면 그것만큼 커다란 위선도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만 가지의 위선을 눈으로 목격하고 또 직접 겪기도 한다. 너무 많은 위선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이게 위선인지 아닌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무뎌지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개인적인 선호, 취향 등 개성으로 치부될 수 있고, 절대적 기준을 세워 이에 끼워 맞춤으로써 억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강요하지도, 함부로 말하지도, 비난하지도 말자. 세상에 고상한 취향은 없다. 내가 듣는 음악, 내가 보는 영화, 내가 좋아하는 책은 나에게만 좋은 것이다. 즉,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나’에게만 좋은 것이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정말 위하고 아낀다면, 그 사람의 취향 정도는 쿨하게 인정해주고 존중해주자. 그것이 정말 그를 사랑하는 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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