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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들 Dec 11. 2019

적당한 조언과 무책임한 위로 그 사이에서

무조건적인 위로의 범람 현상에 대하여

적당한 조언과 무책임한 위로. 그 사이에서 적절한 간격을 유지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비단 말하는 사람에게만 국한된 고민이 아니다. 상대방이 전해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어디까지가 정말 나를 생각해서 건네는 말인 것인지 가늠해야 하는, 말을 듣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다가오는 고민이다.


예전에 한창, 아니 어쩌면 지금도 “~라도 괜찮아”라던가 “~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등의 무한 긍정 메세지가 담긴 책이나 글들이 유행이었고 유행이다. 이들이 전하는 메세지는 간결하다. 한 번 뿐인 인생이고 무엇보다도 ‘내’ 인생, ‘내’ 삶이니까 다른 사람의 무례함이나 꼰대들의 어이없는 간섭에 휘둘리거나 신경 쓰지 말고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뼈 때리는 속시원한 문장과 함께 피와 살이 되는 진정성 넘치는 책과 글들도 있고, 나 또한 이런 말들에 깊은 공감을 표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간혹 보면 적당한 조언이 아닌, 무책임한 위로에 가까운 영양가 없는 말들이 남발되는 경우가 있어 마음 한 켠에서 언짢음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따뜻한 메세지를 전하는 애니메이션 피넛츠(Peanuts)가 근 1, 2년 사이에 대유행인 것도 위로의 범람 현상 때문이리라.


사람들을 무책임한 위로에 빠져들게 한 것은 무엇일까?
이런 듣기에만 좋은 말들이 인생에도 정말 좋은 말들일까?
나는 남들 다 좋다고 하는 말들에 왜 불만스러운 감정을 품게 된 것일까?



가끔 엄마집에 가면, 자취방에는 없는 커다란 TV 앞에 엄마와 둘이 앉아 동네 아줌마들 모여서 수다 떨듯 드라마나 예능을 보면서 이런저런 말들을 주고 받는다. 티비를 보지 않는 나는 자연스럽게 엄마가 즐겨 보시는 프로그램들을 띄엄띄엄 보게 되는데, 다른 건 몰라도 유독 특정 예능 프로그램만 보면 엄마는 말이 많아지신다. 바로 육아 예능이다. 엄마 또한 연년생 남매 둘을 치열하게 키워낸 워킹맘이었기 때문에 육아 예능만 보면 엄마의 손가락 한, 두개가 자연스레 티비 화면 쪽을 향한다. 티비 너머에 있는 연예인들은 듣지 못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아들, 딸에게 하듯 계속 잔소리를 하신다. 엄마는 특히 아이를 너무 깨끗하게만 키우려고 하는 것, 죄다 유기농으로만 먹이고 입히고 쓰게 하는 것에 대해 비판을 하신다. 어차피 나중에 씻기면 되니까 놀이터 갔을 때만이라도 모래 흠뻑 뒤집어쓰면서 놀 줄도 알아야 하고, 꽃이나 풀잎, 나무 같은 것들도 실컷 만지고 냄새 맡아보면서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기농도 물론 좋지만, 가리지 않고 이것 저것 먹고 입어볼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씀도 하신다. 옷이 더러워질까 미끄럼틀에 엉덩이 붙이고 타지도 못하게 하고, 모래 만지면 더럽다고 언니 오빠들 노는 것만 보라고 하고, 5살이 될 때까지 기저귀를 떼지 못해 유치원 갈 나이가 되어서까지 기저귀를 차고 다니는 아이를 볼 때면, 저렇게 키울 수록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아니라 더 병약하고 면역력 낮은 아이로 자라게 된다고 하면서 말이다.




엄마가 어디 가서 남에게 저런 말들을 마구 남발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지만, 이와는 별개로 엄마의 말이 옳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바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무책임한 위로, 달콤하기만 하고 영양가 없는 위로를 건네는 말을 들을 때다. 따끔한 조언이 필요할 때는 새겨들어 마음밭의 자양분으로 삼고, 쓸데없는 말은 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서 재활용 안 되는 쓰레기를 분리해서 버리듯이 잘 가져다가 휙하고 미련 없이 던져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무조건 귀에 듣기 좋고 마음에 편안한 말만 들을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입에 쓴 조언까지도 일단은 들어낼 줄 알아야 한다. 일단 듣고, 그 중에서 마음에 담고 새길 말과 쓰레기통에 버릴 말을 자신의 가치관에 맞게 골라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럴듯하게 말한다고 해서 다 좋은 조언이고 적재적소에 알맞은 충고가 아니다. 특히 밑도 끝도 없이, 줏대도 뭣도 없이 “괜찮아, 괜찮아, XX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혹은 “올해는 우리 꺼!”라며 근거 없는 자신감만 불어넣는, 허황되고 실체 없는 위로만을 건네는 사람의 말은 오히려 독이다. 이런 말들까지 거름망 없이 받아들이게 되면 나중에는 소위 ‘달삼쓰뱉’, 즉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라는 말처럼 정작 뼈와 살 그리고 피가 되는 쓴 말들은 귀담아 들을 수 없게 된다.


달콤하기'만' 한 말은 연애할 때나 필요할 뿐... (출처: 무한도전)


우리는 온실 속 화초, 장미처럼 우아하고 고상하게만 살 수 없다. 우리들 대부분은 거친 야생에서 비바람과 태풍 그리고 쨍쨍 내리쬐는 한여름의 뙤약볕까지도 견뎌낼 수 있어야 하는 야생초다. 온실 속에서 주인이 들려주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적당한 햇살, 습도, 온도, 영양분 아래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내던 화초와 장미는 야생에 내놓으면 바로 사멸된다. 반대로 거친 자연을 견뎌낸 야생초를 온실에 가져다 두면 당연히 멀쩡하게 잘 살아남는다. 아니, 단순히 살아남는 것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균일한 환경에 너무나도 잘 적응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 야생초를 다시 바깥에 내놓으면 마찬가지로 변화된 환경에 적응할 수 없어 죽는다.


우리들 마음도 똑같을 것이다. 괜찮다는 말, 하고 싶은 것 다 하라는 좋은 말만 늘어놓는 무책임한 위로들의 반복 속에서 본인 입에 단 것, 마음에 부드러운 것만 받아들인다면 이는 곧 온실이나 무균실에서 어떠한 자연재해와 병균의 공격도 받지 않고 곱게 자라는 것과 같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에게 정말로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진정성 있는 조언조차도 제대로 받아들일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적당한 때에 적당한 위로(물론 언제나 이 ‘적당히’라는 말만큼 애매하고 무책임하고 어려운 말은 없다고 생각하지만…)는 당연히 필요하고 또 도움이 된다. 사람이 늘 채찍질만 당하고 살면 이 또한 듣기 좋은 말만 듣고 사는 것만큼이나 유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내가 너무 듣기 좋은 말, 달콤한 말, 무책임한 위로에만 중독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내게 정말 득이 되는 정직한 조언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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