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여?’라는 말로 영역 침범 하지 맙시다.
왜 한 번씩 그럴 때 있지 않은가? 나는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닌데, 상대방이 기분 나빠 해서 쩔쩔맸던 그런 경험 말이다. 특히 어떤 주제나 상황에 대해 서로 간 의견 일치가 쉽게 되지 않을 때, 도란도란 나누었던 이야기가 논쟁 혹은 언쟁으로 번져가기 일보 직전일 때,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와 함께 답답함 그리고 서운함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수학처럼 답이 딱 정해져 있는 문제가 아닌, 사람에 따라 그리고 경우에 따라 답이 수십 혹은 수백 가지도 될 수 있는 그런 주제들로 이야기를 해나가다 보면 결국에는 서로 감정이 상한 채로 끝나는 경우가 있다. 그 중에서도 정치, 예술, 신앙 등에 관한 주제는 가치관과 신념에 따라 너무나도 광범위하게 이야기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칫 나를 방어한다는 명목 하에 상대를 공격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신학에 관해 이야기 하다가 “속상하고 이해되지 않는다”며 자신의 생각에 동조해줄 사람을 찾아 나에게까지로 건너 건너 넘어온 친구에게 “그건 받아들이는 그 사람의 영역일 뿐, 네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라고 야멸차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의 전말은 이러했다.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A와 A의 아는 언니 B는 종교를 매개로 해서 친해진 사이다. 둘은 금세 친해져 매주 주말이면 카페에서 성경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신학 공부를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서로 조심스럽게 그리고 유순한 태도로 만남과 공부를 이어가던 둘은, 몇 달 만나는 동안 서로 친해진 만큼 한결 편안해져서인지 더욱 솔직하고 또 때로는 격하게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A가 나를 찾은 날도 어김없이 A와 B는 카페에서 만나 특정 주제로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고, 한 번 시작한 논쟁은 어느새 불이 붙어 서로의 감정을 여지없이 드러내고야 말았다고 한다. 그들의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대화 주제는 <사람들이 특정 종교와 그 종교를 믿는 종교인들을 싫어하는 이유와 근거 그리고 이를 종교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고쳐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고 한다. 나는 엄밀히 말하면 어느 하나의 종교를 신봉하는 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나누었던 대화 자체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져주거나 의견을 보탤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중립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대화 ‘태도’에 대해서는 해주고 싶은 말이 분명하게 있었다.
A: “내가 이렇게 말했어. 언니의 생각은 그저 언니의 생각일 뿐이고, 그것에 대한 객관적 ‘근거’가 없다고. 근거가 없는 생각은 그저 믿음에 지나지 않을 뿐이잖아? 그래서 내가 ‘언니가 그렇게 말한다면, 언니 의견을 존중할게요. 하지만 언니의 견해는 그저 생각이고 견해일 뿐, ‘근거’가 없다는 측면에서 빈약한 의견이라고 말했던 걸 취소하고 싶지는 않아요.’라고 말했어. 그랬더니 얼굴이 갑자기 빨개지고 정색을 하면서 기분 나쁜 티를 내더라? 아니, 이게 왜 기분 나쁜 거지? 내가 지적한 게 맞지 않아? 근거도 없이 자기 ‘생각’만 가지고 그게 옳다고 주장하면, 세상 사람들 말 중에 틀린 게 하나라도 있겠어? 다 맞는 말이지.”
나: “음… 솔직히 말하면 종교인이 아닌 나로서는 네 비판적 견해에 마음이 쏠리고 그래서 네 의견에 동의해. 너도 알다시피 내가 종교에는 좀 회의적이잖아. 그렇지만 네 말이 이성적으로 옳고 합리적인 근거를 가졌다는 걸 다 떠나서, 그 언니가 기분 좋게 그걸 받아들였든, 기분 나쁘게 받아들였든 그건 그 언니의 감정 영역이잖아. 너는 이미 네 입에서 네 말을 떠나보냈고, 그 이후에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 지는 그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 너나 나나 우리가 왈가왈부 할 수 없고, 그저 ‘아 저 사람이 이렇게 받아들였구나.’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거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명확하게 실수한 게 있다면 그 사람의 기분 나쁨에 대해 사과해야 마땅한 거고.”
말은 이렇게 잘난 듯이 하면서도 마음 한 켠이 꽤나 불편했다. 위로해달라고, 내 얘기 좀 들어주고 편 들어달라고 찾아온 친구에게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라며 매몰차게 옳은 말이랍시고 내 생각만을 훌훌 털어놓았으니 말이다. 기분 풀러 왔다가 도리어 나 때문에 한 사람 더 기분 나빠져서 오늘 기분 나쁜 사람이 총 2명이 되어버리는 더블 매직이 발생할까봐, 말을 해놓고도 가슴 졸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는 순간을 빌어 이렇게라도 말해주지 않으면, 이 친구는 잘못 없는 상대방에게 ‘왜 다른 사람의 말을 겸허히 그리고 기분 나쁘지 않게 받아들이지 않냐’며 좋지 않은 감정을 계속 가지고 있을 것만 같았다. 친애하는 친구를 그렇게 내버려두고 싶지는 않았기에 마음은 편하지 않았지만 입바른 소리를 하고 만 것이다. 다행히도 친구는 “곰곰이 생각해보니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어떻게 보면 나도 지금 내 감정만 앞세운 꼴이 된 거잖아. 내 말이 맞든 틀리든, 그 언니 말이 말도 안 되는 말이든 아니든 상관 없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그 사람의 영역인데 내가 그것까지 어떻게 하라고 말할 권리는 없지. 네 말이 맞다, 이 계집애야!”라며, 자칫 기분 나쁠 수 있는 나의 말을 흔쾌히 수용해줬다.
사람들은 아주 흔하게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들 말한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많이 회자되는 만큼, 말하는 사람의 태도와 말투가 중요하다는 사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우리는 이 말을 입버릇처럼 자주 하면서도 그 이면까지 들여다본 적은 없는 듯 하다. 이 말의 뒤편에는 말을 할 때 고운 말, 상대가 듣기 좋은 말투로 말해야 한다는 것을 넘어서서, 기분 나쁜 말투로 말하거나 상대가 듣기 싫은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경우에 상대방이 싫어하는 티를 내면, 말한 사람은 그 부정적인 감정을 온전히 감내하거나, 감내하고 싶지 않다면 애초에 말을 가려서 해야 한다는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지만, 어떻게 살면서 항상 바른 말, 듣기 좋은 말만 하고 살 수 있겠는가? 상대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릴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고 하더라도, 때로는 할 말은 해야 한다. 이런 경우에 최대한 거부감 없는 말투로 다가서되, 상대방이 싫어하거나 기분 나빠하거나 혹은 화를 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고유한 감정 영역이므로 우리는 존중해야 한다. 우리의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가 '나의 이기심에서 발현된 너를 위함'인지, 아니면 정말 순수하게 상대방을 위해서인지 분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며, 설사 정말 순수하게 상대방을 위해서 한 말이라고 할지라도 상대방이 거부하는데 계속 좋게 받아들이라며 핀잔을 주고 강요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는 일종의 꼰대짓이기 때문이다.
내가 굳이 꼰대처럼 이것저것 참견하고 다니지 않아도 세상은 알아서 잘 돌아간다. 사생활을 비롯한 개인적인 영역, 특히 감정과 관련된 영역은 너무나도 ‘사바사(사람 by 사람)’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나와의 다름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필요하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를 때가 많은데, 저 사람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아니, 엄밀히 말하면, (내가 명백하게 잘못해서 사과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저 사람 마음, 알려고 들지도 말자. 그 깊은 속내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이해할 필요도 없는 그 사람만의 고유한 받아들임의 영역이다. 남의 영역, 함부로 침범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