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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들 Dec 20. 2019

인생에도 한 번씩 ‘답정너’가 필요하다.

내가 당신에게 삶의 당위를 요구하는 이유

12월도 반이 지나갔다. 아마 이 글이 세상에 보여질 즈음엔 2019년이 채 열흘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유독 연말이 되면 흐릿했던 날짜 감각이 총명한 아이의 눈망울처럼 또렷해진다. 평소라면 ‘퇼’이라고 부를 만큼 빠르게 지나가지만 즐거운 주말과 그 뒤에 어김없이 월요병 찾아오는 월요일, 죽겠는 화요일, 주중의 한가운데라 그나마 버틸 만 한 수요일, 오늘만 버티면 내일은 불금인 목요일, 오늘 오후부터 주말 시작인 금요일까지 그날이 그날인 것처럼 흐리멍텅하게 보내지만, 12월이 되면 마음부터 뒤숭숭해지기 시작하면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곱씹으며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일까, 이맘때쯤 되면 ‘나 1년 동안 잘 살았나? 지금 이런 상태 그대로 새해를 맞이해도 되는 건가?’라는 고민들을 ‘괜히’ 해본다.


20살을 넘기고서부터 딱히 새해를 기다려본 적 없던 나는 12월과 1월이면 다이어리를 사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며 묵은 나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나를 장착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낯설고 또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어차피 똑같이 주어진 하루가 모여서 일주일, 한 달, 일 년이 되는 것이고, 분절되지 않는 것을 인간의 기준과 언어 그리고 표시로 나누어서 달력을 만들어 2019년과 2020년으로 구별해놓은 것일 뿐인데, 굳이 그 ‘구별’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반성하고 자기 검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래에 예고없이 ‘딩-동’ 벨을 누르며 오랜만에 찾아온 조급증이라는 친구는 이렇듯 회의적이었던 나의 생각에 잔잔하지만 깊은 파문을 던져주었다.




며칠 전, 아는 지인 A를 통해 이름과 얼굴 정도 익힌, 오갈 때 어색하게 인사 나누는 수준으로 알고 지내던 B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B와 나는 4년 전쯤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었고, 그 이후 서로 마주치거나 연락을 한 적은 없었다. 연락이 끊긴 사람들도 어딘가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며 잘 살고 있겠지, 라는 막연히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던 나였기에 B도 깊은 친분은 없었지만 ‘잘 살고 있겠지’ 그룹에 속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소식이 들려왔을 때 반가운 마음이 컸다. B는 나보다 5살 정도 많은데, 마지막으로 마주쳤을 때만 해도 남자친구조차 없었는데 지금은 이미 결혼해서 아이가 3명이나 있다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빠른 그녀의 인생 속도에 놀란 한편, ‘누구는 연애해서 결혼하고 아이까지 가진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난 도대체 뭘 한 거지?’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나의 지난 4년, 어디로...? (출처: 웹툰 <대학일기>)


물론 나보다 5살 많은, 현재 30대 중반의 여성으로서의 그녀가 지나온 과거 4년은, 살아온 30년의 세월보다 빠르게 계획되고 진행되었을 것이다. 20대 때는 학업과 더불어 사회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고 또 적응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비교적 다양하게 많은 것들을 해볼 수 없었다면, 30대가 되면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고 또 그 여유에서부터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만큼 결혼도 계획해볼 수 있고, 실제로 결혼을 하게 되면 그 이후부터는 비교적 술술 진행되는 경우가 많은 듯 하다.


20대의 끝자락에 있지만, ‘그래도’ 아직 20대인 나에게 결혼보다는 일이 중요하고 안정보다는 도전이 더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일찍 결혼한 친구들이 남편과 알콩달콩 살면서 여유롭게 여행 다니고, 아이 좋아하는 친구는 빠르게 연년생 형제를 낳아서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볼 때면, 그 여유로움과 행복감에 나 또한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감정과는 별개로 스스로 빨리 결혼하거나 아이를 갖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4년 전 내 나이 또래였던 B가, 나처럼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있었던 B가 어느새 안정적인 직장에 다정한 남편 그리고 귀여운 아이들에 둘러싸인 채 행복한 모습으로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나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아?’라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물론 나는 누구보다도 스스로를 잘 알아서, 내가 B처럼 안정된 생활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기에 그녀를 부러워하는 게 아니라는 점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의 소식을 듣고 주변인들에게 “나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거 맞겠지? 이렇게 부지런 떨어대는 데도 나는 아직까지 손에 쥔 거 하나 없는데,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하나 둘씩 잘 되어가니까 내가 한심해 보여.”라고 푸념을 늘어놓는 것은, 한 번씩 나약해지는 내 마음에 대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괜찮아. 너 지금 잘 하고 있어.”라는 말을 해주길, 그래서 내 삶과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내 생각에 당위를 제공해주길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위로가 필요할 땐 어찌저찌 해도 스누피 만한 게 없다. (출처: PEANUTS)


아무리 의지가 굳세고 심지가 곧은 사람도 높은 시련의 파도에 부딪히면 한 번씩 크게 흔들리기 마련이다. 그럴 때면 ‘이 자리가 내 자리가 맞나?’, ‘여기 서있어도 괜찮은 걸까?’, ‘되지도 않을 일에 자꾸 매달려서 시간 낭비만 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혹독한 자기 검열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겉으로는 나보다 더 잘 나가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타인들과의 비교도 시작된다. 이렇게 고뇌의 시간을 거치고 있노라면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서 선택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잘 선택한 거야’, ‘괜찮아, 잘 될거야!’, ‘시간이 흐르면 네 선택이 옳았음을 알게 될 거야’와 같은, 확신과 당위를 제공하는 말들이 절실해질 때가 있다.


인간은 강하고 또 주체적인 존재라서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진취적으로 앞으로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지만, 한편으로 인간은 꽤 나약한 존재라서 주변에서 나의 행동을 지지하지 않으면 금방 시무룩해지고 스스로에게 의구심을 품으며 종국에는 자괴감까지 느끼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인 이상 타인으로부터 “괜찮아, 잘 하고 있어!”라는 인정을 받고 외부에서부터 본인에 대한 당위를 인정받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고 또 지극히 정상이다. 세상을 혼자 살아가면 당위 같은 것은 애초에 필요치도 않다. 내가 행하는 것이 올바름이고 내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곧 법인데 당위가 왜 필요하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안에서 동화되어 묻혀 살기 때문에 타인과 줄곧 비교하면서 조급해하기도 하고 그 속에서 내가 잘 하고 있다는 당위와 인정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인생에도 때로는 ‘답정너’가 필요하다. 그리고 얼토당토 않은 것에 당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닌 이상, 이런 ‘발전적인 답정너’는 지극히 정상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지난 한 해와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새로운 나’로 옷을 갈아입는 당위를 ‘새해’로 해가 바뀌는 것에서 찾는다고 하면, 이제는 그러한 사람들의 행동의 이유를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비단 새해에 작심삼일일지라도 호기롭게 계획을 세우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때때로 잘 살고 있는 인생에 한 번씩 조급증이 찾아와 현타가 제대로 올 때에도 우리에겐 당위와 답정너가 필요하다. 적재적소의 답정너 짓은, 내 인생에 당위를 제공해주면서 동시에 예의없이 갑자기 찾아온 비교와 불안으로부터 오는 조급증을 한 방에 뻥 날려버리는, 생각보다 아주 속시원한 해답이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생에 현타가 오고 당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면, 부끄러워 하지 말고 당당하게! 답정너 한 번 되어 보자. 확신이라는 약이 필요한, 잠시 나약해졌지만 더욱 강해질 내 인생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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