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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들 Dec 04. 2019

깐깐함과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깐깐함과 똑부러짐이 마냥 좋은 것인 줄만 알았다.

깐깐함, 똑부러짐, 예민함, 유별남…

이런 수식어들은 주변인들이 나를 정의하는 단어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나라는 사람을 제한하듯 정의하는 이 단어들과 작별을 고하기로 결심했다.




깐깐함이 지나쳐 불평, 불만 많은 사람으로 여겨지는 순간, 타인에게 나는 함께 있을 때 꽤나 불편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여대를 졸업한 나는, ‘주체적인 여성이 되자’라는 말을 4년 내내 듣고 살았다. 그래서인지 주변 사람들에게 무엇을 시켜도 혼자서 곧잘 하는 애, 딱히 도와줄 필요 없는 똑부러지는 애로 인식 되었다. 내 ‘앞’에 펼쳐진 이 말들은, 말만 놓고 보면 ‘제 자랑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꽤나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지만 ‘앞’에 펼쳐진 얘기들과 달리 내 ‘뒤’에는 간혹 너무 과하게 따지고 드는 애, 융통성 있게 넘어가지 못하고 굳이 콕 집어내는 예민한 애, 너무 전투적인 애 등의 단어들이 펼쳐져 있었다.



사람인지라 부정적인 말을 들었을 때 당연하게도 서운함이 먼저 몰려들었다. ‘나는 주체적으로 살도록 교육 받았고 그렇게 살고 있을 뿐인데 왜 다들 나보고 예민하다고 난리야?’라는 생각에 화가 나기도 했다. 내가 정확성을 기하고 이것 저것 따져서 합리적으로 의견 피력을 하는 게 남에게 피해 주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아가 세상을 바꾸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저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을 불편할 정도로 꼬집고 비트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그런 대단한 사람은 못 되더라도 그런 의식 있는 행동에 일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그래서 나에 대한 사람들의 말이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기성 세대에 가까워지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처한 환경과 만나는 사람들이 달라져서인지, 나의 과거를 되돌아보면 조금은 반성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과거의 나는 모든 것에 한 번 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한 번 더 물어보고, 한 번 더 살피는 게 좋은 쪽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또 주체적인 사람이라면 언제 어디에서나 자신 있고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내 의견이 틀리지 않다면 의견을 계속해서 집요하게 관철해 나갈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학교 밖으로 나가 동아리 활동을 하거나 취업 스터디, 영어 학원 스터디 등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해야 할 때면, 나의 장점이라 생각했던 깐깐함, 예민함, 똑부러짐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안에서, 통일된 교육 방침 아래에서 같은 교육을 받고 있는 친구들과 함께 할 때는 내 방식이 옳은 것이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회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부딪히다 보니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과도하게 깐깐해지는 게 맞는 걸까?’라는 의구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또 말에는 힘이 있다고들 하지 않는가? 그래서일까, 나를 향하는 깐깐함, 똑부러짐 등의 단어들이 나의 말과 행위를 제한하는 것만 같았다. 힘들어서 타인에게 조금 의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쓰러질지언정 주체적으로 혼자 다 해나가야 한다며 나를 억지로 몰아붙였고, 똑부러지지 않은 나의 모습 혹은 빈틈 있는 나의 모습을 보이면 다른 사람들이 ‘쟤도 별 거 없네.’라고 생각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조금 더 살아보니 이건 나의 잘못된 자존심에서 나온 일종의 ‘아집’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생각보다 시간이 꽤 흐른 후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주체성 주입’에서부터 멀어지면서, 더불어 식당 알바와 시험 감독 알바, 사무직 알바 등 다양한 경험을 하며 많은 사람을 만나는 과정에서, 나라는 존재가 생각보다 더 평범한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 주장을 굽힐 땐 굽힐 줄도 알고 두루 융화되려면 깐깐하게 굴 것과 융통성 있게 적당히 넘어갈 것을 구별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을 깨닫고 행동을 바꾸고 나니, 이후 만나는 친구들마다 얼굴이랑 표정이 좀 더 유하게 바뀐 것 같다, 긴장하고 있지 않은 모습이 훨씬 보기 좋은 것 같다,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좋아 보인다 등의 칭찬을 아끼지 않고 퍼부었다. 그리고 스스로 느끼기에도 전보다 훨씬 여유 있는 생각과 태도로부터 나의 얼굴과 표정, 마음가짐까지 계속해서 좋은 쪽으로 바뀌고 있는 것 같아 전반적으로 삶이 훨씬 평온해졌다.



소비를 할 때,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합리성을 취하기 위해서는 깐깐하고 똑부러지는 태도로 가격 비교, 스펙 비교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살아가는 것은 물건을 사는 것처럼 정가 100원 짜리 물건을 100원 주고 사오는 것처럼 딱 맞아떨어지고 간단하고 간편하지가 않았다. S사와 L사의 물건 중 뭘 살까 고민이 된다면 성능과 디자인, 가격, 활용도 등을 두루 깐깐하게 살피고 따져서 구입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일상에서, 타인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본인만의 잣대와 기준을 가지고 끝까지 비집고 들어가 상대에게 빈틈 하나 주지 않고 깐깐한 태도로 꼬치꼬치 묻는 태도를 취한다면, 그 상대방은 쉽게 지치고 심지어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며 나를 피할 것이다. 각자 가지고 있는 신념과 가치관을 고수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양보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로마 병사도 일상 생활에서까지 전투적인 자세를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살아가면서 때로는 나의 태도가 상대방을, 타인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그 깐깐함, 어느 정도는 내려놓고 양보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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