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나만의 인생을 그려갈 자유가 있다.
터놓고 자랑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살면서 무례한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만나왔다고 말할 수 있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온실 속 귀한 화초로 자라온 사람은 아닌지라,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며 각종 꼰대, 또라이들로부터 갑질을 무수히 당해왔다. 그랬기에 나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식당이나 카페에서 유니폼을 입고 일하는 나를 한낱 가소로운 알바생쯤으로 여겨 막말을 하는 것 정도는 참아줄 만 했다. 하지만 나를 오랫동안 보아온 가족이나 친구, 지인들이 내게 하는 가벼운 말들은 이상하리만치 가슴을 시리게 했다.
대학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나는 도피성 심정과 도전 정신이 적절하게 혼재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대학원 진학을 결정하게 되었다. 대학을 다니면서 한 번도 대학원 진학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본 후 합격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저 ‘언젠가 필요에 의해 혹은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그때 가야지’ 정도로 생각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대학원 합격증을, 그것도 지원한 모든 대학에서 합격증이 날아오니 대학원 진학에 대한 열망이 더욱 커졌다. 그래서 부모님께 학비와 생활비 마련 방안과 함께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드리고 어렵게 대학원 진학을 허락 받게 되었다.
그렇게 합격과 동시에 진학 허락까지 받은 나는 마지막 학기 기말고사를 위해 12월 말까지 알바를 병행하며 몸을 불사질렀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고서야 조금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쉬엄쉬엄 대학원 입학 준비와 알바를 병행 하다 보니 설날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큰댁으로 향했고, 그날 나는 아침에 집을 나설 때의 산뜻한 발걸음과는 다르게 한없이 무겁고도 마음이 찢어질 듯 슬픈 감정을 겨우 추스르며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발단은 역시나 근황 토크였다. 누구는 이번에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대, 누구는 이번에 결혼한대 등 명절 때만 얼굴 겨우 보는 사촌들의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던 중 집안 막내인 나와 내 동생을 향해 물음표가 던져졌고, 엄마는 웃으며 “우리 딸은 3월에 대학원 입학하고 아들은 군대에서 이제 일병인데, 멀었죠~”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친척들은 모두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쳐다봤고, 큰아버지는 “대학 졸업하면 빨리 취직해서 엄마 좀 덜 힘들게 해드려야지, 대학원은 무슨 대학원이야?”라며 핀잔 섞인 눈빛과 뾰족한 말투로 질타를 했다. 축하해주지는 못할 망정 우리 집안 사정을 언급하며 철 없다는 듯 나를 질책하는 말에 크게 반항심이 올라온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줄줄이 읊으며 “걱정하시는 금전적인 부분은 제가 2년 동안 알아서 한다는 조건으로 대학원 가는 거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라고 보란듯이 웃으며 대꾸했다. 이후로 나는 줄곧 생각해왔다, 그것도 5년이나.
그때 내가 정말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을, 내 욕심으로만 결정했던 것일까?
각자에겐 각자만의 분수가 있다는데, 그럼 내 분수로는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가 허락된 것일까? 근본적으로는, 정말 각자의 분수라는게 있는 걸까?
그런게 정말 있는 거라면, 그건 누가 정하는 걸까?
사실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면 나의 결정은 확실한 ‘무리수’였다. 아빠가 갑자기 심하게 아프시게 되면서 엄마 혼자 생계를 꾸려나가셔야 했다. 나 또한 이런 상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학 다닐 때는 하루에 6시간씩 전공 강의를 들으면서 하루에 4시간 자고 알바 2건을 뛰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 병원비 때문에 엄마와 내가 버는 돈 만으로는 생계가 어려워, 남동생은 어쩔 수 없이 계획보다 빠르게, 당분간 입 하나라도 덜어보자는 엄마의 제안으로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최악까지는 아니었지만 상황은 충분히 좋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큰아버지와 친척들의 반응이 아예 이해 못할 정도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집안 사정 때문에, 내가 앞으로도 계속 노력을 꾸준히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분수’ 타령만 하며 혀를 차는 것이 너무나도 분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결심했다. 앞으로 남은 인생, 내 분수는 내가 결정하고 만들어나가겠다고.
내 인생은 아직 흘러가고 있고, 나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만약 오늘 내 인생이 끝난다는 갑작스럽고도 불행한 가정을 한 번 해본다면, 적어도 나는 내 분수를 내가 결정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이후부터 오늘까지 내 다짐대로 살아왔노라고 자부할 수 있다. 남들이 분수에 맞게 살라며 반대하던 대학원 진학도, 장학금 받고 하루에 알바 3개까지 뛰어가며 생활비 마련해서 나름 성공적으로 마쳤다. 물론 이후 계속해서 하고 싶은 대로, 내가 결심한 분수대로만 살았던 것은 아니다. 졸업 후 1년간 취직하지 못해 자책하고 슬럼프에 빠져 있던 기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 기간마저도 가고 싶은 회사에 가기 위해, 나의 스펙에 비해 문턱이 높더라도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면서 나 좀 한 번 봐달라며 끈질기게 노력했다. 또 지금은 “네 이야기, 특별할 것도 없는데 사람들이 관심 가져줄까?”라며 내가 글 쓰는 것에 대해 우려와 회의감을 표시했던 사람들에게 여봐란듯이 글을 쓰며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분수에 맞게 살아라”라는 말은, 과한 욕심을 부리면 탈이 나는 법이니, 탈 나지 않을 정도로만 하고 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말일 것이다. 하지만 난 여기에 과감하게 물음표와 느낌표를 함께 던지겠다.
“내 분수를 왜 남들이 정하니? 그리고 때로는 과한 욕심도 부릴 줄 알아야 되는 법! 그래야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볼 수 있고, 그 노력으로부터 이전에는 내 분수에 상상도 못 해 볼 것들이 현실이 되어 다가오는 거야!”
“분수에 맞게 살아라”, “그렇게 무모하게 살지마”, “어디서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고 있어?” 우리는 우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도 하기 전에 우리의 말과 행동을 제한하는 부정적인 말들을 너무나도 많이 듣게 된다. 때로는 그들의 부정적인 언사가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실패한 우리를 보고 "거봐, 사람은 분수대로 살아야 한댔어. 내가 뭐랬니? 안 될거라고 했잖아."라고 말하며 스스로의 예측이 맞아떨어진 데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하지만 장담컨대, 그들의 말이 '똑!'하고 맞아떨어지는 것은 오로지 그 패기 넘치던 무모함과 도전 정신에 비해 우리의 노력이 터무니 없이 부족한 것에서부터 실패가 도출되었을 때 뿐이다. 정말 이루고 싶은 것이 있고,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날 제한하는 말에 휘둘리지 말고 시도해보자.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최선의 정도에서 조금 더 나아간 정도의 노력을 기울여보자. 그렇다면 자취가 보이지 않던 구름 같은 나의 꿈, 목표는 현실이 되어 있을 것이고, 그렇게 나는 나의 분수를 스스로 만들어나가고 확장하는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남들이 재단하는 나로만 살기에는 정말 짧고 아까운 인생이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기준으로만 재단 되어야 하고, '나의 분수'는 '나만이' 결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