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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들 Jan 10. 2020

당당한 자신감과 아줌마스러움은 사실 한 끗 차이다.

우리를 규정 짓고 제한하는 말들에 연연하지 말 것.

도대체 ‘아줌마스러움’이라는 단어는 정확히 뭘 뜻하는 걸까? 남들 앞에서 시원시원하게 깔깔거리고 웃는 것? 집에선 남편 앞에서나 자식 앞에서 훌러덩 아무렇지 않게, 편하게 옷을 갈아입는 것? 남 생각 하지 않고 마이웨이인 것?


어제 저녁, 설거지를 하다가 문득 낮에 병원 다녀온 일이 생각났다. 아마도 설거지 하면서 무거운 냄비와 그릇들을 들어올리면서 자연스럽게 아파진 왼쪽 어깨 때문이리라. ‘낮에 주사 맞고 물리치료까지 받았는데 어째 병원 가기 전보다 더 아프네…’라는 생각을 하며 잠시 미간을 찌푸리면서 어깨를 세, 네 바퀴쯤 살살 돌렸다. 그리고는 내가 하지 않으면 누구도 해주지 못하는 집안일을 눈 앞에 둔 자취생의 서러움을 느껴가며 다시 설거지에 몰두했다. 하지만 이내 낮에 병원에서 있었던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설거지라는 것이 생각보다 단순 노동이라서 가만히 서서 손만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일인지라, 나는 유독 청소, 빨래 널고 개기가 아닌,  설거지를 할 때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떠오른다. 특히 떠오른 생각들은 꼭 잊고 싶은 기억들 위주로 상기되는데, 어제 떠오른 기억은 바로 남자 의사 선생님 앞에서 윗옷을 훌러덩 벗어버린 것이었다.


외간 남자 앞에서 옷을 훌러덩 벗었대!


옷을 벗었다는 표현만 놓고 보면 다들 깜짝 놀랄 법 하다. 하지만 너무 직설적인 표현이라서 그렇지, 그 뒤에 숨겨진 내막은 그저 어깨에 주사를 맞기 위해 상의를 들어올린 것 뿐이다. 요즘 다니고 있는 정형외과는 꽤나 큰 병원이라서 선생님이 3분 있고, 3분 모두 남자다. 그래서 선택의 여지 없이 남자 의사 선생님께 치료를 받고 있는데, 오늘도 오랜만에 어깨가 아파서 방문했고 문진을 받고 어깨에 주사를 맞기로 했다. 그런데 이걸 어쩐담! 날씨가 겨울이라 소매가 긴 옷을 두껍게 껴입어서 옷을 들어올리거나 아예 벗어제끼지 않는 이상 어깨에 주사를 맞을 수가 없었다. 의사 선생님은 잠시 당황하는 듯 하더니, 목 부분이 늘어나는 옷이면 옷 속, 어깨 쪽으로 손을 넣어서 어찌 저찌 해보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다가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걱정이 되어 입고 있던 후드티를 아예 벗겠다고 말했다. 의사 선생님은 잠시 놀라시더니, “안에 뭐 입은 거 맞죠?”라고 되물으셨다. 이미 전날부터 병원에 들러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 나오기 전에 일부러 안에 나시티를 입었고, 후드티를 벗고 나시가 드러나자 그제서야 선생님은 치료에 집중하실 수 있었다.


바로 이 일이 설거지 하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과거의 나였다면 남 앞에서 옷을 들어올리는 일은 치료 과정 중이라고 해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20대 중반, 대학원에 다니면서 하도 책상 앞에 앉아서 책 보고 노트북을 두드리느라 허리 쪽엔 측만증이, 목엔 약간의 디스크 증상이 생겼다. 그때 여러 치료와 함께 도수치료도 받았는데, 담당 치료사가 남자였다. 당시엔 치료를 받으면서 어쩔 수 없이 치료사가 어깨, 브래지어 끈 부분, 허리와 골반 그리고 엉덩이 등의 부위를 터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그 터치가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몇 번 참고 치료를 받았는데, 도저히 그 불쾌감을 견딜 수가 없어서 몇 없는 여자 치료사에게로 어렵게 스케줄과 담당을 변경했던 적이 있다. 그만큼 예민하고 불편한 게 많았고 또 남 앞에서 적극적으로 혹은 거리낌 없이 무엇을 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이랬던 내가 내일 모레 서른을 앞두고 다른 성(性)을 가진 남자 의사를 당혹하게 할 만큼 훌러덩 옷을 벗어제낀다던가, 과거에는 부끄러워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후드를 뒤집어쓴 뒤 조심스럽게 방문했던 산부인과를 이제는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다닌다던가, 머리를 하러 미용실에 가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디도 안 하고 눈만 감고 있었지만 이제는 미용사와 절친이 되어 묻지도 않은 것을 먼저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니… 나조차도 그간 나의 모습을 돌아보니 꽤나 당혹스러웠다.


내가 푼수가 되어가는 건가?
이게 친구들이 가끔 말하는 아줌마 되어 가는 것 같다는 그 말인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말하는 ‘아줌마스러움’이라는 것이 도대체 뭘까? 마트에서 남들 이리 저리 밀치면서 카트를 끌고 다니는 것이나 대중교통에서 자리 맡으려고 악착 같이 남들 밀고 들어가는 것? 공중 화장실 칸 안에서 다 해결하고 나오는 게 아니라 화장실 나오면서 동시에 지퍼 올리고 옷매무새 가다듬는 것? 카페나 식당에서 남들 눈치 안 보고 돌고래 데시벨 뿜어내면서 깔깔거리고 전원주씨 특유의 웃음처럼 웃어대는 것?


아니다. 이런 것들이 곧 ‘아줌마’는 절대 아니다. 물론 높은 비율로 저런 특징을 가진 사람들 중에 아줌마가 많은 것은 (비공식 관찰 통계에 따르면)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줌마라는 집단 전체가 저런 이기적인 특징과 성격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또 의아한 것이 하나 더 있다. 보통 어떤 여성을 두고 ‘역시 아줌마네.’라고 비꼬며 말하는 경우를 보면 생각보다 자신감 있고 당당한 태도를 취하는 나이 많은 여성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이말인즉슨, 같은 행동이라도 20대 혹은 30대 미혼 여성이 하면 자신감 있고 당당한 것인데 반해, 애가 있거나 애가 없어도 외관상 나이가 있어 보이는 여성이 하면 ‘아줌마는 역시나…’라는 반응이 터져나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아줌마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아니, 아줌마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리고 있는 걸까?


우리 머릿속에 고정된 이미지의 '아줌마상'


나만 해도 병원에서 있었던 나의 행동을 두고 처음에는 ‘아… 좀 아줌마스러웠나? 아 나도 나이가 들긴 드나보다.’하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좋지 않은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나이를 먹고 여자라면 누구나 아줌마가 된다.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아이를 낳든, 낳지 않든 언젠가 모두 아줌마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걱정하고 생각해봐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아줌마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늦게 아줌마가 될 수 있을까?’, ‘아줌마가 되기 싫다!’가 아니라 ‘어떤’ 아줌마가 될 것이냐, 어떻게 나이 들어갈 것이냐에 관한 것이다.




세상의 기준에 의해 비교해보면, 당당함과 아줌마스러움은 한 끗 차이다. 내가 병원에서 훌러덩 상의를 벗을 수 있었던 것은 ‘제대로 된 치료’라는 목적 달성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가운으로 갈아입거나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안에 나시티를 입고 있었다는 것과 더불어 요즘 다이어트에 성공해 몸매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훌러덩 상의를 들어올렸을 때 보일 처진 뱃살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간에서 말하는 의미의 아줌마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마다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낯가림 없이, 부끄러움 없이 자신 있고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 뿐인데 단지 나이가 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 나름의 이유에 대한 고찰 없이 무조건 ‘아줌마라서 그래.’, ‘우린 나이 들어도 저런 아줌마는 되지 말자.’라며 비난하는 것은, 언젠가 다가올 자신의 미래에 대해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사람의 말과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물론 여기에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서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성격을 가진 아줌마들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 생각한다. 중년 남자들을 두고 ‘아저씨스러움’ 혹은 ‘아저씨라 그래~’, ‘너 저런 아저씨 될까 무섭다’라는 말은 잘 하지 않으면서 (실제로 들어본 적도 거의 없다) 왜 아줌마들만 갖고 달달 볶는 걸까? 길에서 담배 뻑뻑 피우는 아저씨들도 많고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아저씨들, 대중교통에서 앉아있는 젊은이들에게 행패부리며 일어나라고 하는 아저씨들도 많은데 왜 이런 사람들에게는 ‘사람’으로서의 비난은 하면서 ‘아저씨들은 다 그래’라는 비난은 하지 않는 걸까? 남녀 갈등을 조장하고 싶은 것은 절대 아니지만, 이런 주제로 머릿속을 채우다 보면 항상 이와 같은 의문점만 남는 것 같다.


아줌마들에게만 유난히도 극성 맞게 부여되는 이미지들을 떠올려보면 가슴 깊은 곳에서 묵직한 답답함이 올라온다, 으윽.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나이 먹으면 자연스럽게 노인이 되지만, 그렇다고 꼭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우리도 나이를 먹으면 아줌마가 되고 아저씨가 되겠지만, 모두가 다 어른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세상이 말하는 ‘아줌마스러움’은 ‘당당하게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특정 사람들을 겨냥해서 비난하는 말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젠가부터 누구나 나이 먹으면 거쳐가는 ‘아줌마’라는 이름에 특히 부정적인 감정을 투영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 중에도 꼰대가 있고 아줌마스러운 사람들이 있듯이, 나이 든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 그저 그런, 세간에서 말하는 부정적 의미의 아줌마인 것은 아니다. 당당함과 아줌마스러움은 한 끗 차이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아줌마스러운 사람이 될 수도, 당당한 미시(missy)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나를 규정짓고 제한하는 단어에 얽매이지 말고 주관을 가지고 당당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자. 그렇게 되면 설령 누가 봐도 진짜 아줌마처럼 보여지는 날이 와서 누군가 날 “저기, 아줌마!”라고 불러도 딱히 우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푸들 with 스튜디오 크로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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