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한 딸의 실패 연대기와 가장의 눈물
뜨거웠던 어느 여름, 출판사에서 책을 함께 출간해보자는 메일이 왔다. 그리고 가을로 접어드는 목전에 선 나는 2년 반 만에 또다시 “안타깝지만…”으로 시작하는 메일을 받고야 말았다.
시작은 브런치였다. 내가 기고하고 있는 매체의 글을 접한 한 에디터께서 주제와 균일한 톤이 마음에 들어 책으로 출판해보고 싶다는 내용의 연락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실물로 책을 낸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지라 처음에는 제안에 어리둥절 했다. 하지만 이내 누군가가 이렇게까지 내 글을 칭찬해준 것도, 한 스텝 나아가 보자고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말을 해준 것도 처음이라 뛸 듯이 기뻤다. 그리고 나의 지난한 실패 연대기에 종지부를 찍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으로, 남자친구를 제외하고는 부모님과 친한 친구들에게조차 ‘복 달아날까’ 싶어 이야기 하지 않았다. 계약서에 완전히 도장까지 찍은 후에 밝혀도 밝히고 싶었다.
하지만 지난 약 20년 간, 즉 ‘복’이 무엇이고 ‘운’이 무엇이며 ‘사주 팔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게 된 무렵부터 나를 ‘운’명론에 빠뜨리게 했던 나의 실패사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었나 보다. 기존의 원고에 덧붙여 새로운 원고까지 몇 편 쓰고 추후 출간 되면 마케팅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등에 대해서도 메일을 주고 받으며 열심히 의사소통을 했건만, 결과는 ‘파토’였다.
사실 계약서에 확실하게 도장도 찍지 않은 상태에서 희망만 가지고 ‘너무’ 열심히 임했던 나의 순진함이 스스로에게 독으로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나는 ‘나만의’ 커리어를 쌓아나가는 것에 대한 열망이 강렬했다. 서른을 목전에 둔 나이임에도 이루어놓은 것은 하나도 없고, 꿈만 좇고 있었다. 주변에 글을 쓰거나 사진, 영상을 찍는 친구들은 모두 본인의 커리어에서 나름대로의 성공을 거두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예술 쪽에 종사하지 않는 친구들도 이제는 대기업이나 연구소, 공기업에 취직하거나 공무원으로 일을 하며 나름대로 평범하고도 성실하게 밥벌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늘 주변으로부터 “열심히 하니까, 언젠가 될 거야 꼭!”, “누가 아냐?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나중에 한 20년 지나면 네가 제일 잘 나갈 수도?”라며 ‘열심히’에 대한 칭찬만을 들었다. 이렇게 자주 들었던 말들을 곱씹어보니 ‘재능도 없는데 열심히만 하는 게 아닐까? 누가 말했듯이 ‘열심히’는 누구나 다 하는 건데, 살아남으려면 ‘잘’ 해야 하는게 맞는데, 그럼 난 지금 길을 잘못 든 걸까?’라는 자괴감에 빠지게 되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고 지구 내핵까지 뚫고 들어가는 그런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어버린 것이다.
생각해보면, 스스로 남과 비교라는 것을 하기 시작한 때부터 ‘나는 왜 부잣집에서 태어나지 않아서 돈 많이 드는 피아니스트는 꿈도 꿀 수 없는 거지?’, ‘나는 왜 그 흔한 쌍꺼풀조차 없는 거지?’, ‘나는 얼굴도 예쁘지 않은데 왜 키도 작고 날씬하지도 않은 거지?’ 등 ‘나는 왜’로 시작하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달고 살았다. 어렸을 때는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것, 선천적 결핍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했다면, 자라면서 공부와 능력으로 무언가를 성취하게 되면서부터는 ‘나도 이만큼 노력했는데, 왜! 왜 도대체 나는 합격할 수 없는 거지?’와 같은 의문을 달고 살았다. 원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수능날 갑자기 예정일보다 일주일 넘게 먼저 터져버린 생리와 생리통 때문에 수능을 망친 것, 그래서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한 것,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었고 코피까지 흘릴 정도로 열심히 했지만 떨어진 것, 지옥의 공채 시즌을 4번이나 견뎌냈지만 그 누구도 나를 ‘최종’으로 본인 회사의 직원으로 뽑지 않은 것 등 노력과 성과에 관해서는 평생을 실패의 열매만을 거둬왔다. 오죽했으면 개명과 대대적인 성형 수술로 팔자와 관상을 바꿔보려는 생각까지 했었다. 내가 이렇게나 노력했는데, 이렇게나 열심히 했는데 나를 뽑지 않는 것은, 내 일생에 단 한 번이라도 누군가에게 ‘흔쾌히’ 내 능력과 노력으로 선택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은 정말 내가 전생에 크나큰 죄를 저질러서 사주 팔자가 100번 정도는 꼬여줘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출판사로부터 최종적으로 메일을 받은 날, 답장은 아무렇지 않게, ‘그럴 수 있다’며 오히려 담당자를 위로하는 듯한 말을 써서 보냈지만 속으로는 피눈물이 흘렀다. 이 모습을 보고 주변인 중 한 명은 “출판사가 거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기회는 많겠지. 뭐 그거 하나에 그렇게 목 매달고 피눈물을 흘리냐? 별 것도 아닌 것 같은데.”라며 내 가슴을 후벼팠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속으로만 흘리던 눈물이 겉으로까지 터져나왔다. 출판사를 비난하고 싶고 그간의 원고를 새로 써가면서까지 노력한 게 억울해서가 아니었다. 도대체 얼마나 노력해야 나도 남들 한 번쯤은 겪어본다는 그 ‘간택의 기쁨’을 누려볼 수 있을까에 대한 간절함과 평생 그렇게 될 수 없는 운명을 타고 태어난 것일 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막연함의 눈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밤새 뜬 눈으로 나의 미래를 고민했다. 여름의 끝물, 가을의 목전이었지만 아직 해가 빠르게 떠오르는 날들이었던지라 새벽 6시가 조금 넘으니 밖이 환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서둘러 출근을 하고 있었고, 창가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 전날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생각과 함께 허기짐이 몰려왔다. 밥에 물을 말아 엄마 반찬 몇 가지 꺼내놓고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밥을 넘겼다. 그렇게 밥을 먹다, 갑자기 몇 년 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때, 내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목놓아 울던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아빠의 역사도 참 지난했다. 그 운 없음과 복 없음이 마치 유전처럼 나에게 그대로 전달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우리는 평행선을 그리며 마주보고 있다. 아빠는 11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빠가 태어날 때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말 그대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였다, 희끗한 머리를 가진. 아빠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에는 잘 나가던 할아버지의 사업이 망해서 서울 한복판에 100평 짜리 집에 살던 아빠는 가족들과 함께 산동네 쪽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버스비가 없어 왕복 4시간 걸리는 거리를 매일 걸어다녔고, 대학교 때도 점심값이 없어 매일 굶고 걸어다니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동시에 학생 운동을 해서 큰 회사에는 취직하지 못했고, 작은 회사에 겨우 취직했지만 결혼 그리고 내가 태어남과 동시에 퇴사하시고 이후 개인 사업체를 운영하셨다. 그리고 이 일들 사이에 남들보다 늦게 만난 부모님을 남들보다 빠르게 하늘나라로 보내드려야 하는 일도 겪었다. 개인 사업체를 운영하는 동안은 잘 되는 때도 있었지만, 내가 중학교 들어갈 무렵부터는 계속 안 되는 일만 가득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불운은 내가 대학교에 입학한 후에 절정을 이루어 아빠는 결국 백수가 되어 집에, 엄마는 식당에 서빙을 하러 바깥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아빠의 염원으로 공무원 시험 공부를 시작했던 나는 빨리 합격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르바이트와 수험공부를 병행하지 않았고, 그래서 집에서 주는 한 달 용돈 15만 원으로 살았다. 10만 원은 한 달 독서실비였고, 5만 원은 책값이자 간식비였다. 터무니없이 모자랐지만 아침, 점심, 저녁을 왔다갔다 하면서 모두 집에서 떼우고 책은 본 걸 또 보면서 버티고 공부했다. 그렇게 힘들게 공부하는 와중에도 종종 용돈을 받지 못해 독서실비를 밀릴 때면, 총무는 다른 사람들 다 지나다니는 복도에서 돈 10만 원도 없냐며 날 조롱했고, 이 사실에 분노한 나는 집에서 티비만 보는 아빠에게 화살을 돌렸다. 돈도 없으면서 딸자식 덕 보려는 욕심만 많아서 공무원 공부 시켜놓고 무책임 하다며 소리를 질렀다. 아빠는 한참을 멍한 표정으로 내 악다구니를 듣고 있었다. 그러고는 내가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리며 화를 삭히고 있을 때,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아빠도 힘들어. 아빠도 힘들다고. 아빠도 잘 하고 싶은데, 인생이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죽고 싶어.”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흔한 말로 아빠가 슈퍼맨인 줄 알았다. 능력도 있고 할 수도 있는데, 집에서 빈둥대면서 ‘그냥 일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을 고생시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아빠의 상황은 정말 가까운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외면 당할 정도로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의 나처럼 열심히 살았고, 노력도 했는데 도무지 뭐 하나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때는 몰랐다. 아빠가 어떤 마음으로 저 말을 했는지, 아빠도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저 부모로, 아빠로, 가장으로만 생각했을 뿐, 감정이 있어 상처 받고 때로는 좌절하기도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7년 가까이 되는 시간이 흘러서야 나는 나의 좌절과 실패로 말미암아 비로소 아빠를, 그때의 그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참 무정하고 비정한 딸이었다. 당시 아빠의 눈물에 당황한 나는 그 어떤 위로의 말도 한 마디 건네지 못한 채 대문을 박차고 나와 다시 독서실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라면 아빠에게 “힘들었죠? 그동안 살아내느라 고생했어요.”라는 말 한 마디는 건넬 수 있을 것 같다. 아직도 내 인생은 잘 안 풀리고 있고 앞으로 더 나빠질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나의 실패 연대기에서 유일하게, 단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온전한 이해 그리고 몰지각한 비판을 하지 않을 것에 대한 다짐일 것이다. 설사 앞으로 나의 간절한 바람대로 내가 잘나가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때때로 시련과 좌절, 고통이 찾아와 나를 갉아먹는다고 해도 긴 시간이 걸려 눈물과 함께 어렵게 깨달은 이것 만큼은 제발 내 속에서 쉬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