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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들 Dec 29. 2019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 그리고 용기

오늘도 거절 당하고 실패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위한 작은 위로

외강내유. 주변 사람들이 나를 정의하는 말이다. 생긴 것 때문인지, 말투 때문인지 겉으로는 강해보여서 처음에는 다가가기도, 친해지기도 어렵지만 막상 말을 트면 생각보다 장난기 많고 순진하고 또 한편으론 마음이 여려 쉽게 무너지기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란다. 이런 나에게 ‘외유내강’으로 성격을 바꿔야 한다고 조언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유순해 보이면서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의심되는, 그런 의뭉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차라리 다른 사람들이 내 속을 훤히 다 들여보는 것처럼 사는 게 솔직함 측면에서는 더 낫다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외강내유가 단점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외강내유가 인간 관계, 사회 생활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를 갉아먹는 원인이 되니, 정말 이놈의 성격을 견딜 수가 없어졌다.



얼마 전, 또 한 번의 거절 메시지를 받았다.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던 만큼, 시간이 지나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그 순간까지도 여전히 낮은 기대감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면 충격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참 이상하게도, 무언가를 시도하거나 도전할 때는 열정을 다해, 죽을 힘을 다해 열심히 했으면서도 공모전이나 제안서 등을 제출할 때는 그간의 노력의 강도가 너무 세서 그런지, 기대감이 훅 떨어진다. 그래서 ‘잘 되면 좋은 거고, 안 되면 다른 데 또 지원하면 되지.’라고 쉽게 생각해버린다. 그렇게 일단 제출을 하면 한참 잊고 있다가 ‘이쯤 되면 연락이 올 텐데…’ 혹은 ‘아 벌써 일주일 후면 발표날이네!’라며 제출 사실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럼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까지 적게는 일주일, 많게는 몇 달 정도 까맣게 잊고 있었으면서 갑자기 ‘지금 당장 세상이 무너진다 해도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 뿐!’이라는 마인드가 되어서 엄청난 기대감에 부풀어버린다. 그렇게 결과가 도달하기까지 며칠을 잠 못 자고 설레다가 종국에는 거절의 메시지를 받으면 그때는 정말로 세상이 무너져버린다.


이 모든 것의 원흉은 온전히 ‘괴랄 맞은’ 나의 성격 때문이다. 처음부터 기대를 하려면 하고, 말려면 끝까지 말아야지,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다가 마지막에 가서 원하는 결과를 받지 못하니,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나에게 이럴 수는 없는 거야!”라며 바람난 연인에게나 던질 법한 쌍팔년도 대사를 던지고 있다. 그러니 이런 나를 주변에서 누가 쉽게 이해해줄 수 있겠는가? 그래도 이번에 거절 받았던 것은 몇 주 동안 꽤나 공을 들였던 일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정말 자신 있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기대가 컸다. 그런데 긍정의 메세지를 받지 못해 충격이 컸고, ‘글 쓰는 일을 계속 해도 되는 건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3일 정도 주변 사람들을 붙잡고 울다가 하소연 하다가를 반복했다. 워낙 주변에 징징거리지 않는 성격인지라, 연인, 친구 그리고 지인들도 한편으론 놀라며 따뜻하게 위로해줬다. 그럼에도 마음 속 파도는 쉽게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앉아서도 서서도 누워서도 늘상 괴로워만 했다.




그러던 중 침대 위에서 눈을 감고 모로 누워 있는데, 문득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시고…>로 시작하는 기도문이 생각났다. 나는 기독교인도 아니고 성당 근처에도 가본 적 없으며 불교나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를 믿지도 않는다. 한때 불교에 심취해 공부를 해본 적은 있으나, 그 밖에 이렇다 하게 종교 생활을 하며 신을 신실하게 믿어본 적은 없다. 그럼에도 갑자기 몇 년 전, 어느 책에서 슬쩍 봤던 저 기도문이 마음 속에 슬며시 떠올랐다. 갑자기 저 기도문이 나에게 다가온 것이 신의 부름이라던가 계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저 문장 그 자체가 이 순간만큼은 나에게 구원과도 같았다. 지금의 나는 내가 바꿀 수 없는, 이미 결정지어진 결과를 평온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왜?’라는 것에만 집착해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괴롭혀서 그 결과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해당 기도문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달라고 했지만, 나는 이것을 ‘용기’로 바꾸었다. 나에게는 이 절망적인 상황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히 이 상황을 극복하고 또 벗어나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넘어서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행동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용기’가 수반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보다 잘난 사람, 똑똑하고 멋있는 사람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난 사람은 되지 못하더라도 하나밖에 없는 존재로서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은 있다. 그렇기에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거라, 나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해줄 거라고 생각했던 많은 일들에 실패하게 되면, 걸었던 기대만큼 혹은 쏟았던 열정의 크기 만큼 농축된 패배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전전긍긍 하게 되는 때가 있다. 힘든 시간 속에서 힘들다고 토로하는 것도 용기이고, 그 절망을 박차고 나와 다음을 기약하는 것도 용기 있는 것이다. 바꿀 수 없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용기 있는 자세이며, “내 이번엔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를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다음에는 이 결과를 완전히 뒤바꿔버리겠어!”라고 소리치는 것도 용기의 한 표현이다.


이번 기회를 놓쳤다고 해서 좌절만 하고 있다면, 다음, 그 다음 기회도 잡을 수 없다. 그래서 다음을 도전할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 힘들다고 아우성치고 몇 번이고 도리질을 해도 바뀌는 건 없다. 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사람들이 이런 내 마음을 알 리도 없거니와, 나만 괴로울 뿐이다. 생을 마감할 게 아니라면 떠오르는 내일의 햇살을 또다시 받아야 하고, 마음 속에 거절과 실패로 인해 드리운 그림자 밑에 고여있는 살얼음 언 응어리는 한동안 남아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고 바꿀 수 없는 것을 서서히 받아들이게 되는 따스한 평온함이 나를 감싸면, 얼어있던 응어리가 나도 모르는 새에 천천히 녹아내릴 것이다. 그럼 이후에는 평온함을 넘어,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을 내가 바꿔버리겠다는 과감한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단계가 온다.


지금 당장은 불안하고 힘들지만 이 시간마저도 괴로운대로 천천히 음미하고 견디면, 언젠가는 응축된 용기가 폭발할 시간이 올 것이다. 그러니 용기가 생기기에는 아직 버겁고 여전히 평온함이 절실히 필요한, 너무 힘들어 잠시 웅크리게 된 나 자신을 너무 미워하지 말자. 시간이 걸려도 ‘그 때’는 누구나에게 한 번씩은 꼭 찾아올 것이고, 받아들여지지 못한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평온함과 용기가 우리를 충만하게 가득 채울 그 순간을 묵묵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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