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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들 Mar 17. 2020

모녀는 그렇게 단짝이 되어 간다.

나에게는 우리 엄마를 제외했을 때 두 번째 이모라서 둘째 이모라고 부르지만 외할머니에게는 셋째 딸이라서 내가 둘째 이모라고 부를 때면 외할머니는 나의 말에 항상 헷갈려 하시곤 했다. 이모들이 한, 둘이 아닌지라 누구를 부르는 건지 헷갈려 하는 바람에 “이모!”하고 부르면 다들 똑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왜?”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래서 ‘이모’라는 단어 앞에 꼭 순서를 붙여서 말해야 했다. 우리들이 그렇게 부르는 게 한두 번이 아님에도 외할머니는 그럴 때마다 매번 “셋째 보고 왜 둘째 이모라고 허냐?”라고 물으셨다. 그럼 둘째 이모는 겉으로는 툴툴거리는 것 같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않은 특유의 성격이 배어난 말투로 “자기 엄마를 빼면 내가 큰언니 다음이니까 둘째 이모가 맞제!”라고 지겨울 법도 하건만 물을 때마다 꾸준히 대답했다.


츤데레적 기질을 가진 둘째 이모는 다른 자매들과 달리 아들만 딱 둘이다. 다른 자매들은 아들 하나에 딸 하나씩은 꼭 있었고 줄줄이 딸 그리고 딸을 낳은 막내 이모도 마지막에는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둘째 이모는 아들만 둘이라서 늘 딸이 있는 집을 부러워 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이모가 얼마간 우리 집에서 함께 생활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이모는 퇴근길에 종종 아기자기한 머리 고무줄과 헤어 밴드 같은 것을 사와서 머리를 빗겨주며 “이런 게 딸 키우는 재미인데…”라는 말을 종종 남겼었다. 이후에도 이모는 나의 몸과 머리가 함께 커가는 것을 보면서 “딸 있으면 옷도 나눠 입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친구처럼 지내니 얼마나 좋아?”라고 말하곤 했다. 이렇듯 이모의 방점은 항상 ‘친구 같은 모녀’에 찍혀 있었다.



어릴 때는 이모의 말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친구는 친구이고 엄마는 엄마인데 아무리 친한 모녀지간이라 하더라도 친구처럼 스스럼 없이 지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의 나는 오히려 지금보다도 더 보수적이었다. 아이에게 ‘보수적이다’라는 단어를 쓰는 게 참 이질적으로 느껴지지만, 어릴 때 나는 아이다운 사소한 고민과 걱정조차도 부모님께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었다. 어쩌면 의뭉스러웠다는 말이 더 어울릴 수도 있겠다. 몸이 아프거나 지치는 것처럼 눈에 뻔히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말할 수 있었지만, 친구 사이의 문제라던가 내가 해결해야만 하고 누가 도와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일들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쉽게 털어놓지 않고 속으로만 고민하는 경우가 많았다. 


엄마를 무시해서도 아니고 스스로를 과신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엄마에게 말하기 민망하거나 너무 사소하거나 혹은 말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어릴 때 많이 듣던 말이 학교 앞에서 100원 짜리 사탕 하나 사먹은 것조차 미주알 고주알 모두 엄마에게 이야기 하는 애교스럽고 붙임성 좋은 남동생의 성격과 말하기를 귀찮아하는 나의 성격이 서로 바뀌어서 태어났어야 한다는 것이었을까. 그만큼 타인에게 나의 이야기를 터놓고 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비록 그 대상이 가족, 나아가 딸과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엄마라고 할지라도 내가 무엇을 했고 그래서 기분이 어땠고 하는 등의 이야기를 꺼내는 게 타고난 성격상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늘 속상함을 토로하셨다. 친구네 딸들은 오늘 뭘 먹었는데 참 맛있었다,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했는데 싸웠고 그래서 속상했다 등 사소한 그날의 일들을 하나하나 이야기 한다는데 딸이라고 하나 있는 게 애교도 없고 말도 없고 자기 얘기도 하지 않으니 서운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서운함에도 난 늘 어쩔 수 없다는 생각만을 해왔다. 타고난 성격이 무뚝뚝한 것도 있지만 애초에 나의 개인적인 영역에 대한 이야기는 엄마 뿐만 아니라 가까운 친구나 지인들에게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엄마라서, 엄마와의 관계가 데면데면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대로 살다보니 성격상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오랫동안 이렇게 내 성격에 대해 합리화 아닌 합리화를 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막상 독립을 해서 혼자 나와 살다 보니 오히려 상황이 역전 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엄마에게 이것 저것 물어보고 또 엄마가 먼저 물어보지 않아도 오늘은 이걸 먹었고, 어제는 누굴 만났고 친구랑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에 대해 술술 풀어놓게 된 반면, 엄마는 점점 내게 말하지 않는 것들이 늘어났다. 



독립한 후에 밥은 잘 챙겨먹고 다니는지, 빨래는 깨끗하게 해서 입고 다니는지, 치안이 좋은 곳에서 별 탈 없이 살고 있는지에 대해 엄마가 먼저 물어보기 전에 안심시켜 드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부러 이것 저것 먼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나씩 이야기를 하다보니 처음에는 쭈뼛쭈뼛 말을 꺼내기 시작했던 것들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엄마는 반대로 혼자 나가 살면서 제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들 텐데 사소한 집안일로 딸을 걱정하게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나에게 숨기는 것들이 많아졌다. 대표적으로 건강과 관련된 것들을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병원에 며칠 입원해서 검사를 받아야 하는 정도의 건강상 문제도 내가 신경 쓰고 걱정 할까봐 말하지 않고 있다가 다 지나간 후에야 ‘이런 일이 있었어’와 같은 식으로 남의 이야기 하듯 가볍게 말하고 넘기는 것이다. 그럴 때면 건강 문제 만큼은 딸인 나도 정확하게 제때 알 권리가 있다며 목소리를 높이지만 늘 한 발 늦게 알게 되는 것은 여전하다. 


이렇게 서로 반대 방향의 끝자락에 서있던 딸과 엄마는 30년의 세월을 지나오면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중간 지점으로 한 발자국씩 이동해가고 있다.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이미 시작 지점에서 출발은 했지만 언제 중간 지점에서 만날 수 있을지, 지금 도대체 어느 지점까지 온 것인지는 우리 둘 다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모녀이자 친구이자 동반자가 되기 위해 오늘도 조금씩 상대방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아직 완전한 베스트 프렌드가 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모녀는 그렇게 매일 조금씩 단짝이 되어 가고 있다.


©푸들 with 스튜디오 크로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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