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을 원동력 삼는 베짱이의 삶
‘가끔’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생각보다 ‘자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가 있다. 이건 아마 내가 가진 여러 불치병이자 고질병 중 하나이리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생의 첫 기억 언저리에서부터 난 하고 싶은 것에는 극도로 몰두했고 하기 싫은 것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으며 그렇게 하고 싶었던 어쩔 줄 몰라 했던 일도 시간이 지날수록 말라비틀어진 걸레처럼 싱싱한 열정 한 방울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물기를 쫙 빼낸 후 쉽게 버리곤 했다.
이런 나를 답답하게 지켜보던 엄마는 외할머니와 팔짱을 끼고 내 사주팔자가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건지 알아보고자 그 세계 전문가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녀는 이내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되었다.
“아줌마 딸은 지구력이 부족해. 말 그대로 끈기가 부족하다는 거야.
그러니까 뭘 해도 금방 불 붙었다가 확 타오르고 재만 남아버리는 거지.
지구력을 좀 길러야 돼. 그런데 그게 어디 쉽나? 타고난 팔자가 이런데.”
지구력은 달리기를 할 때나 필요한 건 줄 알았는데… 아니다, 생각해보니 내가 달리기를 유독 못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아, 그랬던 거구나. 나는 역술가의 말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엄마는 절망 속에 숨겨진 한 자락 희망을 찾고자 고군분투 했다. 엄마는 간식을 눈 앞에 둔 강아지에게 연신 “기다려!”를 외치는 주인처럼 내가 무언가를 포기하려는 기색이라도 보이면 끈질기게 눈을 맞추고 엄한 표정을 지으며 나의 경솔한 행동을 저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우리 집 막내 똘이 만큼도 인내심이 없는 나는 곧잘 간식을 눈 앞에 들이밀고 약 올리는 주인의 손을 아무렇지 않게 덥석 물어버리는 개처럼 굴곤 했다. 그리고 나는 이내 내가 사람을 이렇게나 빨리 포기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무도 나를 칭찬해주지 않는 팍팍한 세상에서 남모를 새로운 재능을 하나 건져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다.
재능은 재능인데 쉽게 아무데서나 막 보여줄 수 없는 금기된 재능을 가진 나는 가진 재능의 특수성 때문에 남들의 눈을 피해 재능을 뽐내곤 했다. 그리하여 이 재능은 꽃을 피워 ‘남들이 볼 때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지만, 남들의 눈을 피해 게으름을 피우는’ 그리고 ‘시키는 것은 곧잘, 아니 정말 잘 하는데 시키지 않는 것을 스스로 찾아서 하는 능력은 부족한’ 인간을 만들어냈다. 학창시절 성적표에는 마치 한 선생님이 12년 내내 생활통지표 발달 상황을 쓴 것처럼 매번 단어는 다르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같은 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성실하고 교우관계도 좋고 학업 성적이 우수하지만
시키는 것 외에 창의적인 활동이나 스스로 찾아서 학습하는 능력이 부족함!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는 오래된 격언에 힘차게 반기를 들듯 시키지 않은 일은 굳이 찾아서 하지 않으면서 때론 남이 시킨 일조차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면 굳이 열심히 하려 들지 않는 뺀질한 기질은 여든 까지 가는 세 살 버릇처럼 어릴 때부터 습관이 되어온 것 같다. 그렇다고 책임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스스로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은 창대한 시작에 미치지도 못할 만큼의 미약한 결론을 맞이한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내 손에서 끝을 보려고 했고, 타인과 함께 해야 하는 작업에 있어서는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고 수준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프리랜서로 사회에 발을 내딛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내가 원하면 하고, 원치 않으면 하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무언가를 시작하려고 하는 시도조차도 하지 않는 나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또 일단 시작하면 어떻게든 진행은 하지만, 시작하기 전까지 이리 미루고 저리 미루고 끝까지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뤘다가 시간에 쫓겨 억지로 시작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도중에라도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전전긍긍 하며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성실하게 끈질기게 매달리기 보다는 손에서 팍 놓아버리고 마냥 놀 때가 많았다.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안 되면 어떻게든 매달리고 노력해서라도 되게 해야 하는데 오히려 손을 놓고 원래부터 내 일이 아니었던 것처럼 논다고? 그들에겐 어불성설의 결정체가 나란 인간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뺀질함의 발현도 내겐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일이 안 될 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저냥 마냥 논다. 때 맞춰서 끼니를 챙겨먹는 것도 성실함의 일부인 것 같아 끼니도 거르거나 아무때나 먹고 싶을 때만 먹는다. 씻는 것도 자는 것도 하고 싶을 때 한다. 유튜브를 봤다가 넷플릭스로 전환하고 라디오를 듣다가도 만화책을 펼치고 잡지로 갈아탔다가 다 지겨워지면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팔다리를 뻗어서 대자로 누운 후 천장을 보면서 눈만 깜빡이기도 한다. 공원이나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사람들 구경하는 그런 일도 하지 않는다. 밖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일이라서 조금이라도 의식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것들에서 한참 멀어져 보는 것이다.
이렇게 한 3~4일 한낱 미물처럼 숨만 쉬면서 살다보면 갑자기 전기가 들어오는 것처럼 번뜩 정신 스위치가 ‘ON’ 상태로 바뀐다. 이 정도 놀았으면 됐다, 이제는 일을 해야만 이 하찮고 변변찮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라는 생각과 함께 마음이 서늘해지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닥과 일심동체였던 등허리가 좌불안석으로 들썩인다. 죄책감이라는 녀석이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죄책감은 부정적인 감정이다. 사람을 위축되게 하고 불안하게 하며 속으로 썩어가게 만든다. 하지만 난 이걸 원동력 삼아 인생을 꾸려간다. 죄책감은 나에게 있어 인생의 동반자와도 같은 것이다. 속은 아직 여물지 못했지만 세상에서 정한 기준에 따르면 어른인 나에게는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내 본성과 성향은 하기 싫은 일을 대할 때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길 좋아한다. 현실과 본성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죄책감을 이용하는 것이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거나 하기 싫을 때는 마냥 논다. 놀다보면 이래도 되나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죄책감과 조바심, 안절부절함이 세트로 몰려오는 때다. 떼로 몰려와 못 받은 빚을 독촉하는 빚쟁이들처럼 어서 결과물을 내놓으라고, 일을 하라고 나를 다그치면 그때에 이르러서야 조급함에 다시 손에 일을 쥔다. 내 인생을 축약하라면 모든 것들이 이 과정의 무수한 반복이다.
명사들의 강연이나 다큐멘터리에서 세상 멋진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나도 저 대단한 사람들처럼 범접할 수 없이 숭고한 목표 의식과 꺾일 줄 모르는 의지와 인내심, 끈기로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벅찬 감정이 솟아오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깜냥이 안 되는가 보다. 그저 죄책감이나 동반자 삼아 먹고 살기에 급급해져야만 위기의식을 느끼는 모양새가 베짱이가 환생한 것과 다를 바가 없기에.
그럼에도 오늘도 스스로에게 특유의 자기 합리화와 위로를 건넨다. 나처럼 일말의 죄책감을 등에 업은 베짱이가 세상에 몇 마리 정도 있어줘야 그렇지 않은 개미들의 노력과 성실함, 끈기와 인내로 대변되는 지구력이라는 것이 별처럼 반짝이면서 그 가치가 본래의 온전한 그것보다 폄하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