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들 Mar 26. 2020

안 하겠다라는 말이 아직 쉬운 건

철이 덜 들어서인가 오기만 늘어서인가

나는 드라마를 자주 보지 않는 편이다. 몇 년 전이긴 하지만 <도깨비>가 여인들에게 그렇게 유명해져서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가 온 세상을 휘감아도 절대 그 드라마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동백꽃 필 무렵>이 아무리 힐링 드라마라고 해도, <이태원 클라쓰>가 너무 너무 재미있어서 다음 주를 못 기다리겠다고 해도 나의 드라마 외면은 계속 되었다. 이건 오히려 드라마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벌어진, 나의 몸부림의 일종이다.


일단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면 그 다음이 궁금해서 일주일 동안 밤잠을 설친다. 이미 최종화까지 마무리 된 드라마라면 정주행이 끝날 때까지 다른 일에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없다. 16부작이든 20부작이든 완벽하게 정주행을 끝내고 나면 하얗게 재가 되어버린 시간과 기름진 얼굴로 감지 않고 꽉 묶은 채 틀어올린 머리를 열심히 긁으며 널부러져 있는 한 여자만 남아있을 뿐이다. 나를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드라마에서 한 발자국, 아니 열 발자국 정도는 멀찍이 떨어져 있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내가 뒤늦게 <멜로가 체질>이라는 드라마에 빠졌다. 유쾌, 상쾌, 통쾌! 3쾌를 아우르는 찰진 대사와 배우들 간의 착착 맞아떨어지는 꿀조합 케미를 보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해서 다음 에피소드를 재생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영상미도 좋고 배우들 케미도 좋고 에피소드도 지루하지 않고, 다 좋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나의 마음을 거울로 비춰본 것처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듯한 대사다.



주인공 진주는 드라마 작가 지망생이’었’다. 그러던 중 공모전에 냈던 대본이 방송국 PD의 눈에 띄어 16부작 드라마로 제작하자는 제의를 받았고 정식 작가로 데뷔할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꼭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함께 일하게 될 조연출이 헤어진 전남친임을 알게 되자 두 번 생각도 않고 “안 해요”라고 외친다. 잘 나가는 드라마 작가의 보조 작가였다가 되바라진 소리 몇 번 했다고 잘려서 백수가 된 진주는 자신의 처지를 다시 곱씹어보기도 전에 버릇처럼 자존심부터 내세운다. 그것도 헤어진 지 한참 된 전남친 때문에. 집에 와서야 이성의 끈을 다시 붙잡고 후회를 담은 포효를 해대는 진주에게 친구들은 말한다.


“우리 나이에 안 한다는 말, 더 신중히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진주와 친구들의 나이는 서른이다. 서른이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고, 그렇게 믿었지만 전혀 괜찮지 않은 서른. 나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20대 중반이면 대학을 졸업하고 어엿한 직장에 취직해서 커피에 꽂힌 빨대를 쪽쪽 빨아가며 팍팍한 인생 얘기, 더럽게 안 풀리는 연애사를 늘어놓으며 보이지 않는 미래를 어떻게든 그려나가기 위해 고군분투 하다가 20대 후반 정도 되면 괜찮은 남자 만나서 적당히 만나고 사귀다가 결혼해서 내 집 마련과 자녀 계획을 세우는 그런 평범한 인생을 그렸었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미래를 생각했기에 ‘미래를 꿈꿨다’와 같은 희망적이고 아름다운 단어를 쓰지는 않겠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때 그려본 서른줄에 들어설 때의 내 모습이 적어도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뭐라도 되어 있을 줄 알았고, 남들 보기에 조그마한 것이라도 변변한 것 하나쯤은 내 손으로 내 힘으로 일궈놓았을 줄 알았다. 연애든 커리어든 인생이든 하나라도 말이다. 하지만 난 여전히 매일 밤 침대에 누워 ‘오늘 하루, 밥값은 하고 산 걸까?’를 떠올리고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프리랜서라고 하고 반 백수라고 읽는 이의 숙명인, 하이에나처럼 일을 찾는 것에 몰두하고 있다. 


이렇게 고민, 걱정, 불안, 초조와 같이 온갖 부정적인 감정은 다 떠안고 살면서도 여전히 자존심은 중2처럼 세서 분명 참고 버티면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도 ‘참고 버티면’을 감당하지 못해 “안 해요”를 외칠 때가 있다.


물론 저지르고 나서 후회할 때가 대부분이다. 아니, 분명 한 번씩 내뱉은 “안 해요”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고 외마디 비명을 지를 때가 있다. 다시 되돌려서 “할 수 있어요. 하고 싶습니다”로 말을 바꾸고 싶은 심정을 담아 통화 버튼을 누르려고 했던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후회만을 남기는 결말로 끝내버리곤 했다. 


진주에게 남겨진 말은 나이가 들수록 모든 일에 좀 더 진중하고 책임감 있는 태도로 임해야 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지극히도 당연한 말이다. 너무 당연해서, 그래서 청개구리 같은 태도로 반기를 들고 싶다. 이런 마인드부터가 내가 아직 철이 덜 든건지 아니면 나이 먹고 오히려 줏대만 세우면서 오기를 부리는 건지 잘 모르겠다. 



책임감 없는 태도는 정말 싫어하지만, 그럼에도 나이를 먹었어도 가끔은 나와 맞지 않는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조율하고 협의하고 양보하지 않고 그냥 “안 해요”라고 말하면서 살고 싶다. 이런 태도가 신중하지 못하고 가벼워 보인다고 하더라도 한 번씩은 거부도 하고 거절도 하면서 싫은 걸 억지로 받아들이려 노력하지 않고 살고 싶다. 그래야만 책임질 것 많고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인생의 많은 것들 사이에서 숨통이 트일 것만 같다.


철이 없다고 해도, 오기와 객기로만 가득하다고 말해도 좋다. 누구도 내게 주지 않고 또 줄 수 없는 후련함과 가벼움이라는 것을 내게 선사할 수만 있다면 한 번쯤 또라이 취급 정도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확고한 취향의 발견이 나를 기쁘게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