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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들 Apr 08. 2020

포옹이 주는 백 마디 위로

상대적 힘듦을 대하는 자세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고 자기 얘기를 잘 하지 않는다. 대신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장단도 맞춰주고 상담도 곧잘 해준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쑥스럽다는 말과 함께 미소를 흘리며 말을 돌릴 뿐.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애써 그가 화제를 전환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그는 그 흔한 힘들다는 말도 잘 하지 않는다. 그저 줄곧 참고 참고 또 참을 뿐이다. 그의 부모는 줄곧 말했다.


“애가 어찌된 일인지 어릴 때부터 몸이 아픈 건 그렇게 티를 잘 냈어. 엄살도 심했고 아프다는 말도 잘 했지. 별 거 아닌 감기나 두통에도 울음부터 터뜨리곤 했으니까. 그런데 속에 있는 얘기는 죽어도 안 해.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을 안 해서 담임 선생님한테 전화가 오면 그때서야 알게 됐지. 애가 어찌나 속으로 독종인지 나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


그 또한 알고 있고 느끼고 있다. 본인의 한계점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이대로라면 무너질 것 같다는 것을. 그럼에도 드러내지 않는다. 타고나길 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어 보일 줄 몰랐기에 차마 드러내지 ‘못’한 것일 수 있다. 물론 어쩌면 배움과 관찰을 통해서 감정을 드러내고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법을 배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만 이렇게 힘든 건 아니겠지. 다 그런 거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삼키고 또 삼켰을 뿐이다. 그런 그가 힘겹게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


“나 너무 힘들어. 나만 이렇게 힘든 거야? 아니, 남들도 다 힘든 거라고, 너만 힘든 게 아니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 나보다 더 힘들고 아프고 어렵고 슬픈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내 힘듦이, 내 아픔이, 내 슬픔이 없어지거나 사그라드는 건 아니잖아?”


처음으로 입 밖에 꺼낸 감정의 토로와 폭발에 주변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를 껴안았다. 그래, 마음껏 울고 마음껏 슬퍼하고 마음껏 안겨, 우리가 네 옆에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야, 라는 듯이.



우리는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상대적으로 평가되고 재단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직장도 외모도 사는 동네도 들고 다니는 가방도 신고 다니는 신발도 먹는 음식도, 심지어 가난까지도 모두 상대적인 기준으로 이야기 된다. 그래, 여기까진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대기업에 다니는 것과 중소기업에 다니는 것, 예쁘고 잘난 외모와 그렇지 않은 평범하거나 못생긴 외모, 강남 브랜드 아파트에 사는 것과 수도권 변두리 빌라에 사는 것이 눈에 보이도록 다른데 어떻게 비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때론 ‘상대적’이라는 수식어가 달가운 경우도 있다. 너와 내가 서로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임을 말하고 싶을 때 혹은 짜증나거나 피하고 싶은 상황이 눈 앞에 닥쳤을 때, 굳이 갑이나 강자가 되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조금 더 약한 사람, 안 된 사람, 안쓰러운 사람이 되고 싶을 때 ‘상대적’이라는 말 뒤에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너와 나의 가치관이 달라서 생기는 문제야. 즉 틀린 게 아니라 서로 다른 거지. 상대적인 문제일 뿐이야.”


이런 문장으로 쉽게 싸움과 논쟁을 피해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상대적이라는 말은 참 변명거리 삼기 좋다. 하지만 감정 문제에서 만큼은 상대적인 게,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지점을 받아들이기가 참 어렵다. 사랑도 서운함도 안타까움도 행복도 슬픔도 외로움도 화남도 지겨움도, 외쳤을 때 그대로 되돌아오는 메아리처럼 그대로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차가운 반응을 감당하는 것은 참 힘들다. 


그래서일까, 25살에 학교를 졸업하면서 스무 살이라는 패기 넘치던 나이에도 얻지 못했던 어른이라는 타이틀을 겨우 달게 된 때부터 힘들다는 말이 그렇게 하기 힘들었다. 힘들다는 말조차 하기 힘들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주변에 힘들다고 쉽게 말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그들의 푸념에는 매번 이상한 위로가 돌아갔다.


“너만 힘든 거 아니야. 다 힘들어.”

“네 나이 때는 원래 다 그래.”

“너 정도가 힘들다고 하면 어떻게 하냐? 더 못 살고 더 힘든 사람들을 생각해 봐. 네가 생각보다 운이 좋다고 생각하게 될 걸?”

“사람은 저마다 각자의 위치에서 힘듦과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거야. 그렇게 힘들다, 힘들다 해서 어디 이 험난한 세상 살아갈 수 있겠어?”


도대체 힘들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위로랍시고 어떤 말을 던지고 있는 걸까? 위로를 가장한 새로운 힘듦을 힘들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얹어주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그에게는 힘들다 말 할 때 말없이 그를 꼬옥 안아줄 사람들이 있기에, 그의 감정을 상대적인 잣대로만 재단하지 않기에 그는 이제 자신의 힘듦을 마음껏 그리고 힘껏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서로를 껴안은 공간에 다른 말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다. 백 마디 말보다 더 진하고 깊은 이해를 담은 포옹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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