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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 하루 Apr 05. 2023

13살은 핑크가 어울려

반티 색깔 고르기

내가 다니던 여중에서 가장 큰 행사는 학급별 댄스 대회였다. 반별로 음악과 컨셉을 정하고 넓은 운동장에서 대형을 바꿔가며 여러 명이 추는 춤은 지금도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을 만큼 크고 웅장했다. 대회를 위해 주말에도 학교에 나와 연습을 할 정도로 아주 중요한 행사였다.


댄스 대회에서 통일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반티를 맞추는 건 필수였다.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쉽게 견적서를 받고 클릭 한 번에 주문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으니 캐주얼 의류를 파는 매장에 직접 가서 주문을 하고 걷은 돈으로 결재를 하고, 얼마간 기다렸다가 매장에 직접 가지러 가야하는 번거러움이 뒤따랐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 했던가. 검은색 반팔티에 검은색 천으로 입을 가린 의상을 입은 다른 반 친구들이 운동장에 등장하자 쨍한 파랑과 하얀색 쫄바지로 한껏 밝은 분위기를 낸 우리 반 옷이 얼마나 유치해 보이던지...... 하얀색 쫄바지 덕에 한껏 도드라진 허벅지를 가리느라 쭈뼛거리며 동작을 했고 그 때문인지 우리 반은 본선에 진출하지 못하고 쭈르륵 미끄러졌다. 그렇게 내가 입은 반티는 슬픈 기억을 남겼다.


교사가 되고 두 번째 해에 접어들어 6학년을 맡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변성기에 접어든 아이들을 데리고 동요 부르기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맞춘 반티 색깔이 핑크였다. 핑크색 반티는 한껏 밝은 분위기였지만 노래는 그렇지 못했고 무대에 섰다는 것에 만족하고 돌아와야 했다. 그렇게 아이들의 핑크색 반티는 쓰라린 기억을 남겼다.


그 후로도 파란색, 오렌지색 등으로 몇 번 더 반티를 맞추다가 몇 번 입지 않고 의류수거함에 들어가는 쓰레기가 된다는 생각에 몇 해 전부터는 반티를 맞추지 않았다. 그러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삼 년 동안 가지 못했던 수학여행을 가는 아이들을 위해 반티를 선물하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반티 색깔을 고르라고 하자 너도나도 검은색이란다. 검은색...... 내가 그 나이였을 때 멋져 보였지만 막상 어른이 되고 보니 칙칙하게 느껴지는 그 색. 겨울 내내 김밥들이 걸어 다니는 것 같은 검은색 패딩의 그 색. 다른 반이 먼저 찜 했다는 말로 위기를 넘기고 다른 색 중에서 고르기로 했다.


그다음은 회색, 주황색, 노란색 등등 여러 의견이 나오다 한 여학생이 핑크로 하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했고 마음속으로 파란색을 생각했던 나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핑크를 좋아하는 여학생들과 장난기 담아 손을 든 몇몇 남학생 덕분에 우리 반 티셔츠 색깔은 핑크색으로 결정되었다.


핑크색이 뭐냐고 쉬는 시간 내내 툴툴거리는 아이들도 있긴 했지만 어쨌든 우리 반 티셔츠 색깔은 핑크다. 그렇게 돌고 돌아 다시 핑크색 반티를 입은 13살 아이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핑크색 옷을 입고 체육대회도 하고, 수학여행도 가고, 체험학습도 가고...... 생각만 해도 핑크색처럼 기분이 말랑거린다. 참, 졸업앨범에도 핑크색 옷이 선명하게 남겠네.


나도 핑크색 반티 같이 입고 아이들 곁에 슬쩍 서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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