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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 하루 Apr 13. 2023

네, 잘 불어요

리코더

초등학교 3학년 때, 다른 건 기억이 나질 않는데 딱 두 가지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리코더와 전학. 나이 지긋한 남자 선생님이 담임선생님이셨다. 어린 내가 보기에 나이가 지긋하다고 보여진건 탈모가 진행된 헤어스타일 때문일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분이 잊히지 않는 건 나에게 리코더를 잘 분다고 아주 많이 칭찬을 해주신 덕분이다. 


선생님은 음악시간마다 나에게 앞에 나와서 시범을 보이도록 했는데, 리코더를 들고 교실 앞으로 나가는 순간 나는 우리나라 최고의 리코더 연주가가 된 듯했다. 연주가 끝나면 아이들의 박수 소리가 들리고 선생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 감촉을 느끼며 자존감이 으쓱 올라갔다.


8개의 구멍이 뚫린 검은색 플라스틱 악기는 어떤 곡이든 몇 번 연습만 하면 쉽게 연주할 수 있었다. 취구에 투투하고 혀를 닿게 연주하면 깨끗하고 분명한 소리가 나는 게 좋았다. 선생님의 칭찬에 취해 그 시절 집에서 많이도 연습을 했다. 세 개의 조각으로 분리해서 침을 닦아내고 청소를 했다.


2학기가 되고 이사를 하면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무척이나 아쉬운 표정으로 내 리코더 실력을 칭찬하셨다. 그리고 시범 보일 학생이 없다며 걱정을 하셨더랬다. 나 역시 정든 학교와 친구들을 떠나는 것보다 더 이상 친구들 앞에서 리코더 시범을 보일 수 없다는 것이 더 아쉬울 정도였다. 그렇게 나에게 리코더는 자신감을 선물해 준 플라스틱 악기 이상의 것이었다.



6학년 음악 시간에 리코더 연주하는 부분이 나왔다. 코로나 시국에 리코더는 비말을 생성하는 불어서는 안 되는 악기로 취급받았던 터라 아이들의 연주 실력은 형편이 없었다. 심지어 오른손이 아래쪽인지 왼손이 아래인지 헷갈려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기본 운지를 몇 번 연습하고 나서야 아주 천천히 교과서에 나온 곡을 연주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계이름이 적힌 악보를 보며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리코더를 불었고, 나는 자꾸만 틀리면서 피아노 반주를 했다. 아이들도 틀리고, 나도 틀려가며 그렇게 어설픈 연주를 했다.


그 후로 몇 시간 정도 더 수업을 하고 나자 아이들 리코더 연주와 내 피아노 반주가 조금씩 맞춰졌다. 아이들의 생기 있는 목소리와 닮은 리코더의 쨍하고 분명한 소리가 교실에 가득 찼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에 리코더 멜로디가 함께 떠다녔다. 


그 순간의 공기, 바람, 분위기, 리코더소리, 아이들의 진지함. 모든 게 좋았다. 


어린 시절 리코더가 키워주었던 자신감이 마음속에서 훅하고 되살아났다. 그때 키워둔 리코더 연주 실력을 지금까지 써먹을지 누가 알았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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