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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 하루 Nov 17. 2022

일요일 근무를 하고 계실 남궁인 선생님께

오롯이 나

최근에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라는 책을 읽은 데다 어제 강연에서 만난 남궁인 선생님을 기억하고 싶어 수신인은 명확하지만 수신인이 읽으리라는 보장 없는 편지를 써 봅니다. 이슬아 작가도 아니면서 뭐하는 짓일까 잠시 망설여 보다가 그냥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남궁인 선생님의 강의를 집 근처 도서관에서 들을 수 있다니 이게 웬 횡재인가 싶었습니다. 추측컨대  선착순 예약 50명 중 일 등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강연은 2시에 시작한다고 했지만 맨 앞자리 가운데 앉고 싶다는 욕심에 40분 전에 강연 장소에서 기다렸습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께서 청소를 위해 문을 열어주지 않으셨다면 더운 복도에서 더 오래 기다릴 뻔했습니다. 살짝 열린 틈으로 관계자가 컴퓨터를 만지고 있는 것이 보였고, 저는 제가 목표하는 그 자리 맨 앞 가운데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강연 5분 전쯤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저는 왠지 짐짓 모른 체 했습니다. 성시경 콘서트에서 성시경을 처음 봤을 때처럼 살짝 떨렸으면서 말입니다. 관심 없는 척 책을 보며 비겁하게 선생님을 흘끔거렸습니다. 스트라이프 폴로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습니다. 강연 중간에 보여주신 청와대 방문 사진처럼 맞춤 슈트를 쫙 빼입고 오지 않아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


서울은 비가 내리고 흐린 날씨였는데 여기 오니 해가 떠서 반갑더라는 흔한 날씨 이야기로 강연을 시작하는데 어딘지 모르게 살짝 어색해 보였습니다. 원래 첫마디는 떨리는 법이지요. 강연은 선생님의 다양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저는 강연 전에 걱정이 있었습니다. 글을 통해 알았던 그 사람이 말을 하면 어쩐지 조금은 가벼운 느낌이 들었거든요. 정선되고 잘 다듬어진 차분한 글보다 말이라는 것은 한없이 가볍게 느껴지는 법이니까요. 역시 말은 별로인가 싶었는데 강의가 진행될수록 말도 잘하는 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뒤 쪽에 서 있던 관계자가 어떤 수신호를 주었는지 갑자기 강연 도중 마스크를 벗으면서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마스크 안에 가려진 선한 인상이 드러났습니다. 


'만약은 없다'에 쓰셨던 에피소드부터 최근, 어제에 겪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담담히 풀어놓으셨습니다. 너무 진지해 질까 걱정이셨는지 귀여운 사진을 곁들인 여담도 함께요.(다음에 강연을 들으실 분들을 위해 스포는 하지 않겠습니다.)


응급의학과 의사로, 작가로, 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그간 해왔던 일들도 함께 이야기해주셨습니다. 말미에 질문 시간이 있다면 응급의학과 의사를 그만 둘 생각을 한 적은 없냐는 질문을 하려다가 강연 도중 답을 찾은 것 같아 따로 질문을 하진 않았습니다.


강연 말미에는 저서 중에 일부를 읽어주셨습니다.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에서 읽었던 글귀도 보이고, 다른 에세이에서 읽었던 글들도 읽어 주셨습니다. 작가의 목소리로 듣는 글귀는 또 다른 느낌이 들더군요. 평소에 병원에서 보았던 많은 의사들의 하얀 피부와 냉정한 말투가 작가님에게도 살짝 보이긴 했지만(이것은 직업병으로 보입니다.) 어린이, 노동자와 같은 약자들 이야기에서 힘을 실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니 오프 날 지방까지 와서 강연을 하는 이유가 이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맨 앞자리, 더군다나 맨 앞에 앉아 있으니 모범생다운 자세로 앉아야겠지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며 강의를 열심히 들었습니다. 슬프거나 잔인한 대목에서는 눈썹도 찡그려 가면서요. 바람직한 청자의 역할을 열심히 했는데, 기억을 해주시려는지 모르겠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관계자가 한번 더 감사 인사를 하면서 완벽한 강의였다는 찬사를 보내니 커다란 눈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더군요. 그 모습을 보고 혼자 웃기도 했습니다. "싸인을 부탁해도 될까요?" 하고 용기 내어 말했더니 흔쾌히 된다고 하셔서 첫 번째로 나갔습니다.


실없이 30분 전에 먼저 왔노라, 그래서 맨 앞자리에 앉았노라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그 이야기를 했는지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강연이었는지 모르겠다며 겸손의 말씀을 하셨고, 무척 인상 깊은 강연이었으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입장에서 아동학대 부분이 가슴 아팠다고 답했습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제 이름을 묻고 잠시 어떤 말을 쓸까 고민하는 듯하더니 친애하는 000, 그 흔하다는 오해를 이겨내고 라는 말을 쓰더군요.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는 책을 내밀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이 쓴 책에 플래그가 표시되어 있는 것이 기특했는지 이것도 한번 언급해 주시더군요. 역시 자상한 분입니다.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이 없다면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서둘러 감사 인사를 전하고 강연장을 빠져나왔습니다.


남편은 왜 이리 늦었냐고 묻고는 같이 사진을 찍었냐고 했습니다. 사인만 받았다고 하니까 그럼 배터리 걱정은 왜 했냐고 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어도 찍어주셨을 텐데 왜 그 말을 하지 않았을까 하고요. 사실 강연 도중 그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닙니다만 실례가 될 것만 같아 고이 접어둔 욕망이거든요. 남편의 말을 들은 후부터 계속 생각이 났습니다. 사진, 사진.... 같이 찍었으면 좋았을걸.... 두고두고 볼걸 하고요. 혹시 다음에 또 뵐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꼭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해야겠습니다.


이슬아 작가님이 남궁인 선생님이라 부르길래 저도 따라 해 보았습니다만 사실 선생님과 저는 동년배입니다. 혼자만 마음속으로 반말을 해보기도 했지요. 독자가 작가를 만난다는 건 어쩌면 짝사랑하는 대상을 만나는 것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독자는 글을 읽으며 작가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친한 사이라고 착각을 하게 되니까요. 반면 작가는 다수의 독자에 대해 전혀 모르지요. 이건 짝사랑하는 관계가 분명해 보입니다. 저 혼자 동갑 운운하며 반말 어쩌고 하는 걸 보니 확실합니다.


남궁인 선생님, 가을 날씨치고 더웠던 어느 날, 강연장 맨 앞자리에서 고개를 주억거리던 줄무늬 티셔츠를 입었던 여인을 기억해 주시렵니까? 저는 큰 눈이 선해 보였던 멋진 의사 겸 작가님을 기억해 보려 합니다. 늘 그 자리에서 지금처럼 꿋꿋하게 계셔 주시길......


                                                                                                                       2022. 9. 18.

                                                                남궁인 선생님과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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