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향기가 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멋모르던 신규교사 시절 만난 선배님이 그러했다. 학교라는 공간이 아니었다면 그냥 할아버지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나이가 많은 선생님이었다. 하회탈처럼 눈이 반달 모양으로 바뀌며 허허 너털웃음을 짓는 모습은 보는 사람의 마음도 넉넉하게 만들었다.
선생님은 1학년을 맡아 가르치고 계셨다. 당시 나는 1학년이 가장 무서운(?) 학년이었다. 나도 이제 막 교직생활에 입학한 처지에 1학년을 맡기에 깜냥이 되질 않았다.유치원을 벗어나 학교라는 곳에 왔지만 아직은 학생이 아닌 존재, 날것 그대로의 순수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선생님 교실을 지나가면 늘 아이들 웃는 소리가 나는 것이다. 선생님 곁에는 늘 포도송이 마냥 주렁주렁 아이들이 매달려 있었다. 선생님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면 매번 칭찬 일색이었다. 인사를 잘해서, 예쁘게 웃어서, 신발을 잘 넣어서....... 모든 게 칭찬거리였다.
가르치는 일은 연습이 없었고, 6학년 아이들을 만나 무작정 시행착오를 겪던 나는 하루하루 수업을 하는 일만으로도 벅찼다. 당연히 아이들이 가진 각각의 예쁜 면을 찾아 칭찬할 여유가 없었다.
선생님을 뵈러 가면 머그컵에 믹스 커피를 간이 딱 맞게 타 주시곤 했다. 그리곤 늘 말씀하셨다.
진정한 초등학교 교사가 되려면 꼭 1학년을 가르쳐 봐야 해.
신규 교사가 유난히 많았던 이제 막 지어진 학교에서 선생님은 우리들의 선생님이었다. 선생님과 2년 여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힘들 때는 기대고, 달달한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땐 선생님을 뵈러 갔다.
선생님의 정년퇴임을 앞두고 우리는 의미 있는 선물을 고민했다. 그러다 마음이 맞는 젊은 교사들이 모여 퇴임식에서 노래를 불러드리기로 했다. 어떤 곡이 좋을까 고민하다 첫 소절이 와닿는 오래된 포크송 '장미'를 골랐다.
당신에게선 꽃내음이 나네요. 잠자는 나를 깨우고 가네요.
연인을 장미에 빗대며 사랑을 표현한 곡이지만 꽃내음이 나는 선생님과 어울리는 가사라고 생각했다. 기타를 칠 수 있는 선생님이 반주를 하고 화음도 넣어가며 열심히 연습을 했다.
정년퇴임식 날. 학교의 모든 선생님들이 함께 모여 그동안 교직생활하시느라 고생하셨다는 축하와 덕담을 건네고 함께 준비한 선물도 드렸다. 그리고 노래 선물을 드릴 시간. 선생님과 눈 맞춤을 하며 장미꽃을 드리고 노래를 했다. 선생님은 하회탈 같은 눈웃음으로 화답해 주셨고, 마지막에는 눈물로 아쉬움을 표현하셨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 모두 코끝이 찡해진 채 식을 마쳤다.
퇴직 후에는 조용한 섬에서 노년을 보내실 거라고 하셨다. 어느 곳에 가시더라도 주변 사람을 넉넉하게 품으며 남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이제 1학년 아이들을 네 번이나 만났고, 또 1학년을 맡으라고 해도 겁나지 않을 만큼 경력이 쌓였다. 그래도 선생님처럼 너털웃음 지으며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가진 보물을 찾아 반질반질 닦아줄 만큼 넓고 깊은 사람은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