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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 하루 Jan 20. 2023

학부모 아니 간호사를 만나면

이 년 전, 건강검진을 하러 갔는데 문진표를 들여다보던 간호사가 말을 건넸다.

"혹시 A선생님 아니신가요? 저 B 엄마예요."

"아, 여기 근무하시나 봐요." (당황)

"선생님 이름이 흔하지 않아서 혹시나 했어요."

'아, 계속 다니던 곳인데 불편하네......' 


이 년이 지나고 오늘 다시 건강검진을 하러 갔다. 학부모와 어색하고 반가운 인사를 나눈 뒤, 문진표를 받았다. 문진표를 작성할 때마다 한 번 했던 질문은 다시 안 하면 안 될까 생각한다. 예를 들면 초경 나이 같은 것. 초경 나이가 변할리 없는데 이 년마다 초경했던 나이를 떠올린다. 귀찮은 것은 둘째치고 오늘은 이 문진표를 학부모, 아니 간호사에게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 못내 마음이 쓰였다.


학부모 아니 간호사에게 문진표를 제출하며 괜히 겸연쩍었다. 세 번이나 적은 주소와 두 번 적은 주민번호 같은 개인정보를 학부모 아니 간호사에게 보여주어야 해서다. 뿐만 아니라 내가 일주일에 강도 높은 운동 따위 0회라고 적은 것이나 이 년 전에 비해 조금 늘어난 체중 같은 지극히 사사로우면서 부끄러운 기록(속된 말로 TMI)을 보여주는 것이 목욕탕에서 알몸으로 만난 것 같다.


그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다른 환자를 부를 때와 달리 내 이름을 부를 때 마지막 글자에서 소리가 조금 더 줄어든다. 내시경을 하러 들어가려는데 외투와 가방, 읽던 책을 맡아주겠다는 친절을 베푼다. 

'아...... 불편하군.'


내시경을 마치고 나서 수면마취가 깨지 않아 해롱거리는 찰나에도 뒷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 넘겼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정신을 부여잡고 애써 괜찮은 척 소지품을 맡아준 감사 인사를 명랑하게 건넸다.


검진이 끝난 후로 그는 간호사로서 역할을 마감하고 학부모로 역할을 교체했다. 

"우리 B는 여전히 쑥스러움이 많아서 학년이 바뀔 때마다 걱정이 많아요."

"그런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크면서 괜찮아진답니다."

"형은 그렇지 않거든요. 그래서 저도 걱정이 돼요."

"교사도 새 학년이 바뀌면 어색하고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아이들도 마찬가지죠."


갑자기 데스크를 사이에 두고 교실이 되어 버렸다. 병원에서 상담이라니...... 학교 이외의 장소에서 학부모를 만나는 일은 교사 역시 어렵다. 작년에는 첫째 머리를 하러 미용실에 갔다가 파마를 하고 있는 학생과 학부모를 만나 갑자기 미용실에서 상담을 하기도 했다. 교사 역시 교실을 벗어나면 소비자이거나 보행자이거나 환자이거나 이용객에 불과해지는데 학부모를 만났을 때 재빠른 역할 교체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 보니 우연이 학부모를 만나는 일이 부담스럽다.



소여사는 근처에 나가더라도 단정하게 하고 나가라고 하신다. 공무원의 품위유지 의무와 비슷한 결인데, 언제 어디서 학부모를 만날지 모른다는 말씀이다. 머리도 감지 않고 부스스한 추리닝 차림의 담임을 보게 된다면 아이들을 잘 가르칠 거라는 믿음까지 훼손되려나?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좀 깨겠지.......


건강검진을 갔다가 학부모 아니 간호사를 만나고 느낀 점이라면 밖에 나갈 때는 어쩌면 만날지도 모르는 학부모를 깜짝 놀라게(너무 지저분하거나 부스스하거나 이상하거나)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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