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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그녀 Jan 17. 2020

05. 쓰고 싶다는 마음 뒤에 숨어 살고 있다

- 끝내, 내가 희망하는 것 

                                                                                                                                                   

무언가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건, 고등학생 때였다. 

쓴다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 무언가를 쓰고 싶었다. 


내 최초의 글쓰기는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학교 신문에 실릴 글을 모집한다는 기사를 보고 덥석 써서 낸 글이 신문에 실렸을 때, 

'거짓말로 도배된' 그 글이, 그게 거짓말이라는 게 탄로 날까 봐 두려우면서도 묘한 쾌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기억이 생생한 걸 보면 어쩌면 그때부터 글을 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뒤 잊고 있었던 마음이 되살아 난 게 고등학생 때였다. 


김형경의 국민일보 문학상 수상작품인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라는 장편 소설을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하고 읽은 뒤에 그 내용을 다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멋있다.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고등학생 시절 내가 쓴 소설(그걸 소설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들은 모두 어두운 내용들이었다. 

부정하고 싶지만 그 당시 부모의 이혼은, 엄마의 부재는 그 나이 때의 천진난만한, 철부지여도 무관한 여고생으로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겉으론 밝고 쾌활했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불안과 우울과 외로움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로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 마음에 대한 이야기들을 관념적으로, 추상적으로 늘어놓았던 게 나의 최초의 소설들이었다. 


문예창작과에 입학을 하고 시와 소설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글쓰기를 배웠다. 

'쓴다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글쓰기의 기술을, 수많은 문학작품을 내 안에 쌓아둘 수 있었던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소설을 쓴 다는 게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구나, 재능이 수반되어야 하는구나,를 느끼게 한 최초의 좌절을 맛보게 해 준 시기이기도 했다. 


모르겠다. 

실패하면서, 계속 실패하면서도 썼다면, 

정말 어쩌면 등단이라는 시스템을 통과해 작가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었을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게 글은 소설이 전부였으므로, 등단이 작가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었으므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뒤 나의 책 읽기는 육아 이전의 세계와 육아 이후의 세계가 완전히 달라진 것만큼이나 달라졌다.

소설과 시를 집중적으로 읽던 나는, 엄마가 된 뒤 육아서를 찾아다녔다. 아마 헤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도대체 어떻게 아이를 길러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나만 바라보고 있는 그 아이를 내가 잘 키울 수 없을까 봐 두려워서

'육아', '엄마'가 제목에 들어가는 책을 찾아 읽었다. 


엄마라는 이름이 익숙해지고, 아이도 아기 티를 벗어나 대화가 통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자꾸 사라지는 '나'를 붙자고 싶어서, 육아만 하다 삶이 끝나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함에, 가족이 생기고, 아이들이 생겼지만 어쩐지 더 외로워져서 '위로', '용기', '자존감' 같은 제목이 들어가는 에세이를 찾아 읽었다. 


그러는 사이 조금씩 변화하는 나를, 

 나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글쓰기의 유일한 방법이 소설이라고 믿었던 내가 '너무 좁은 세상 안에 갇혀 살았구나' 싶어 졌고,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너무 많구나, 싶어 겸손해졌고, 

문학 작품이 아니더라도 좋은 글이, 좋은 책이 세상엔 정말 많구나 하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 


그때부터 다시 시작됐다. 


'나는 무언가를 쓰고 싶은가' 

'정말 그런가'

'그렇다면 무슨 이야기를 쓰고 싶은가' 


처음으로 돌아가 나에게 질문을 하는 시간들이 늘어 갔다.                                               

Image by Free-Photos from Pixabay


                                                                                                                                                 

그렇다고 글을 쓸 수 있게 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고 쓰고 싶다는 '꿈'만 가지고 있었을 때보다 '쓴 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졌다. 


쓰지 못해서 읽었다. 무작정 읽고, 또 읽으면서 쓰고 싶다는 욕망을 대체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바람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믿고 있다).

'읽는다는 것'이 주는 위로와, 삶이 충만해지는 경험과,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노력과,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는 약간의 용기와 사회의 부조리를 들여다볼 수 있는, 그것에 대해 한 마디 의견을 낼 수 있는 부족하지만 어떤 의식 같은 것들이 내 안에 쌓이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 나는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예전보다 성숙한 사람이 되었다고,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라고 믿게 되었다. 

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요즈음 나는 

다시 '무언가'가 쓰고 싶다. 

문제는 '그 무언가'가 정말 '무언지' 명확히 잡히지 않는다는 것. 


막연하게 '쓰고 싶다'라는 생각은

중언부언 긴 설명을 만들었고, 군더더기 가득한 문장들을 만들었다. 

완성되었다고 생각한 글을 다시 읽을 때면 '아쉬워.' 하는 생각 때문에 결국 마침표를 찍지 못한 글로 남고 말았다.


"나를 양보하지 않으려고 쓴다. 세상의 이름과 규정이 더는 나를 대신하지 못하도록 이름을 뚫고 말 거는 거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화병이 나거나 몸이 간지러워서 죽을 것 같으니까. 당신 속에 있는 나를, 비체가 된 나를 당신이 소외시키지 않았으면 한다. (중략) 이제 나는 더 크게 숨 쉬고, 더 깊게 잠수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나의 꾸물꾸물한 오늘을 지켜냈으면 좋겠다.
- 홍승희  『붉은 선』 중에서, p11


홍승희의  『붉은 선』이라는 책에서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자신이 왜 글을 쓰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다니, 

게다가 저렇게 멋진 이유라니, 하는 생각에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쓰고 싶다는 마음 뒤에 숨어 갈팡질팡하고 있는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는 내가 왜 쓰고 싶은지, 무엇을 쓰고 싶은지 모르겠다. 

이것만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답이다. 


더 늦기 전에, 영영 쓰는 일에서 멀어지기 전에 

그러나 조급하지 않게 답을 찾아가는 시간을 갖는 것. 

끝내 멋진 답을 찾지는 못하더라도 '무언가' 쓰는 일을 시작하는 것. 


이것만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약속이다. 


2020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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