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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그녀 May 23. 2019

그냥 지랄하면서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 최은미 <어제는 봄>을 읽는 밤

                                                                                                                                       

"애기 안 봐준다고 전화도 자주 안 하네."

지난밤 전화를 건 엄마의 첫마디가 마음 한구석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무슨~ 통화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구먼. 밥은 먹었어?" 괜히 미안해져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갑자기 심장이 아파서 병원 가서 초음파 검사받았어"

"뭐래?"

"심장은 이상이 없는데, 고지혈증 약을 잘 안 챙겨 먹었다고 의사한테 혼났지."

"그러게. 약 좀 잘 챙겨 먹어. 운동도 좀 하고...."

결국 내 잔소리로 전화 통화가 끝났다. 


아이들이 나를 향해 '엄마' 하고 부를 때, 내가 엄마를 향해 '엄마' 하고 부를 때 어쩐지 느낌이 다르게 다가온다. 나는 어느새 아이들에게도 엄마에게도 보호자의 위치가 되었다. 어느 날엔 그 책임감이 내가 다 감당해 낼 수 있는 걸까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엄마'가 등장하는 소설 혹은 에세이를 읽을 때마다 자꾸 겹쳐지는 나의 엄마. 

외로워서, 외로움을 못 견뎌서 늘 사람이 주변에 있어야 하고,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야 하는 나의 엄마. 

아프다고 힘들다도 자주 구시렁 하면서도 내가 바쁠 때 언제 나 나의 아이들을 돌봐주는 나의 엄마. 

지독히도 미워했지만 그 미움만큼 이젠 안쓰럽고, 더 못해주는 게 미안해지는 나의 엄마. 

........ 

누구나 자신의 엄마 이야기를 하면 반나절을 아니 한나절을 꼬박 주절거려도 모자라지 않을까. 


<어제는 봄> 속에 등장하는 '나 '역시 지독히도 엄마를 미워하면서 자랐다.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을 가슴에 품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빠에 대한 원망 혹은 미안함, 그리움만큼 '엄마'에 대한 미움을 가득 키우면서 살아왔다. 

나는, 소설 속 '나'가 '엄마'를 향해 가지는 감정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아졌다. 


어느 지점에서 내가 자라면서 '엄마'를 향해 가졌던 '미움'의 모양과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 이 소설이 마냥 편할 수만은 없었다. 

물론 소설은 엄마와 딸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나'의 이야기다. 


다른 것도 많이 없지만 성욕마저도 없는 남편과 사는 '나'

등단한 지 10년째 이름만 작가인 채로 사는 '나'

아이를 둔 대부분의 엄마들이 그렇듯 아이의 일상에 초점을 맞추며 사는 '나'

조금씩 조금씩 작아지는 '나'를 마주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

밋밋한 일상 중에 취재차 만난 경찰 이선우를 통해 꿈틀대는 욕망을 느끼게 되는 '나'

그런 욕망조차 커질까 쉬쉬하고, 숨겨버리려는 '나' 


'나'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한 여자의 시간에 대해, 사라지는 여성성에 대해, 참아야 하는 욕망에 대해 생각했다. 

사회적 시선, '엄마'라는 역할을 한 여자에게 사회가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도덕성, 한 남자의 아내에게 드리우는 인내,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소설의 이야기와 얽혀 지금의 '나'를 다시금 바라보게 했다. 


딸은 엄마를 애증 할 수밖에 없나. 

미워해도 미워할 수 없나. 엄마와 딸의 관계는 얼마나 지독한가. 


엄마는 늘 말한다. 윤 서방한테 고마워하라고. 니가 아직도 글에 매달려 있을 수 있는 건 다 윤서방이 배려해줘서라고. 윤 서방은 바람도 안 피우고 도박도 안 하며 술도 많이 안 먹고 나를 때리지도 않는다. 그런 남편한데 뭔가를 더 요구하면 나는 손쉽게 좋지 않은 여자가 될 수 있다. 엄마는 이런 말도 한다. 이리저리 돌려 말하지만 요점은 그것이다. 윤 서방이랑 많이 자주라고. 
엄마가 말하는 말 중 최고는 이것이다. 같이 자식 낳고 산 부부만 한 게 없다고. 나는 엄마가 마치 그해 봄을 다 잊은 것처럼 그 말을 하는 게 놀랍다. 나는 해마다 그 봄을 다시 겪는데 엄마가 마치 평범한 엄마인 척하는 게 울렁거린다. 하지만 나는 참는다. 참는 것은 나의 특기니까. 친정 엄마와 남편, 그 둘한테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참는다. 참고 약을 먹는다. 사방에 조팝나무 꽃이 피기 시작하고 윤 서방과 장모님이 동시에 메시지를 날리는 이런 날, 약을 먹는다. 
- <어제는 봄> 중에서, p67



남편을 '윤 서방'이라 부르고 엄마를 '장모님'이라고 지칭하는 '나'가 가진 상처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래, 왜 엄마들은 자신의 잘 못을 기억하지 못하지? 하고 억울해졌다. 나 역시 다 자란 뒤에 엄마를 향해 " 엄마, 그때 내가 정말 상처 받았었어"라고 용기 내 고백한 적이 있다. 그때 엄마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투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나는 그 말에, 엄마의 그 당당함에 다시 한번 상처 받고 말았다. 그 이후로 나는 엄마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소설 속의 나처럼 '참는다'. 하고 



결혼을 하기 전에 나는 결혼을 하면 내 원가족한테서 조금이라도 멀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를 안 보고 내 아빠의 형제들을 안 보기 위해선 결혼을 해선 안 된다는 걸 몰랐다. 나에게 남편과 아이가 생기는 순간 내 남편과 아이에겐 처갓집과 외갓집이 있는 게 정상이 되리라는 걸, 정상이 아니기 위해선 정상인 척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나는 몰랐다. 결혼을 하는 순간 내 원가족과 더 철저히 묶이리라는 걸 몰랐다. 
- <어제는 봄> 중에서, p90



 결혼을 하는 순간, 내게 시댁이 생기고 시누이가 생기고 신랑의 친척들이 내 친척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도 말 몰랐다. 콩깍지 제대로 씌어 한 남자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결혼이 가지는 막중한 책임감은 '사랑'이라는 이름 뒤에 교묘하게 가려져 있었다. 결혼식과 동시에 갑자기 툭 튀어나와 사람을 환장하게 만들 거라는 것도. 


결혼과 함께, 아이를 낳는 순간과 동시에 '나'를 잃어버리는 '여자들'을 안쓰럽다 여기면서 왜 한편으로는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왜 그 힘듦은 여자들끼리만 나누고 공감해야 하지. 왜 여자들이 시댁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고 여전히 남아 있는 가부장적인 제도에 대해 불만을 이야기할 때 하찮은 가십거리 다루듯 개인적인 일들로 치부해버리지. 

왜 '아빠의 자존감 수업' 같은 책은 찾아보기도 힘들면서 '엄마를 위한' '엄마가' '엄마에 의한' 같은 말들이 붙은 책들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지. 왜 엄마의 욕망은 가사와 육아 뒷전으로 밀려나야 하지. 


이런 생각들이 툭툭 튀어나와 소설을 읽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한 페이지를 넘기고 공감하다 딴생각하고, 몇 페이지를 넘기곤 괜히 혼자 울컥해서 궁시렁거리느라 내가 소설에 제대로 집중했는지 책장을 덮고 나선 이야기의 줄거리를 다시금 떠올려 봐야 했다. 

아쉬움이 남았던 건, 

결국 자신의 욕망을 끝내 참아버린 '나'

자신이 가장 잘하는 건 '참는 일'이라고 말하는 '나'였다. 

과거의 상처로 만들어진 지금 '나'는 결국 미래에도 과거의 상처를 안은 채 그대로 일 것만 같아서. 

이건 너무 희망이 없는 것 같아서. 괜히 더 감정 이입하게 만들어 버려서. 


내가 블라인드를 완전히 쳐버려서, 이제 이선우가 나한테 정말로 연락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블라인드를 내리지 말라고 했던 이선우의 말 때문에, 다음 날부터 블라인드를 내리지 못한다. 6월의 따가운 햇볕이 전면으로 쏟아지는데, 이선우가 다시 거기 서서 나를 올려다볼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블라인드를 내리지 못한다. 옆자리 손님이 눈치를 줘도 내리지 못한다. 노트북 화면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흰 한글 창에 내 얼굴이 비치는데, 내리지 못한다. 내리지 못하고 쓴다. 내 얼굴을 보면서 쓴다. 벌을 받으면서 쓴다. 애초에 이선우를  만나게 된 것도 이 글을 쓰기 위해서였으니까, 낯선 사람이 두 어 달 만에 일으켜버린 이런 돌풍쯤, 내가 이 소설을 쓰는 중에 일어난 많은 일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쓴다. 나무를 보면서 쓴다. 잎이 무성해져서 가지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쓴다. 나는 나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나무에 매달려서 죽고 싶을 만큼 나무가 좋아. 집에서도 카페에서도 동네 어디를 가도 이 동네 말고 다른 동네를 가도 어디에서나 나무가 보이고 나는 나무를 보면서 쓴다. 사거리로 지나다니는 숱한 사람들을 노려보면서 쓴다. 저 평범해 보이고 무던해 보이는 사람들이 무엇에 웃고 무엇에 눈물을 흘리고 무엇을 누르고 사는지 모르겠어서. 알 것 같았는데 모르겠어서. 내 이야기가 저들에게 가닿는 길은 왜 그렇게 먼 건지, 어떤 경로가 더 있는 건지 왜 나한테는 닫혀 있는지. 내가 쓴 것들이 우스워서, 같잖아서, 노트북으로 카페 유리창을 박살 내버리고 싶은 마음으로 쓴다. 냉장고 야채칸에서 오이가 물컹해질 때까지 쓴다. 남편한테 지랄하면서 쓴다. 지랄을 안 하면 몰라. 가만히 있으면 다 당연한 줄 알아서. 내 딸이, 편지에 자꾸 노력하겠다고 쓰는 게 마음이 아파서, 사랑한다고만 쓰면 되는데 자꾸 노력하겠다고 해서, 착한 딸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해서, 미안하다고 해서, 아프면 투정을 부리는 게 아니라 나한테 미안하다고 해서, 잠들 딸을 보면서 울고 난 날은 더 이상 지랄할 힘도 없어서, 그냥 쓴다. - <어제는 봄> 중에서, p117


돌아보지 마. 그냥 멈춰.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고 그냥 앞으로 걸어가. 그리고 그렇게 그냥 지랄하면서 써 줘. 

뭐든. '나'의 이야기를. 

자꾸 소설 속의 '나'에게 말 걸고 싶어 졌다. 



                                                                                                                                                                  

 어제는 봄 / 저자 최은미 / 출판 현대문학 / 발매 2019.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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