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마음을 기억하는 시간

- 다카야나기 사치코 <빨간 머리 앤을 좋아합니다>를 읽는 밤

by 목요일그녀
잘못을 빌고 용서를 받는 일은 정말 기분이 좋아요.
오늘 밤은 별이 참 예쁘지 않아요?
아주머니, 만약에 별에 가서 살게 된다면 어느 별에 살고 싶으세요?

내가 빨간 머리 앤을 좋아하는 이유는 '용감하다는 것, 솔직하다는 것, 사랑스럽다는 것'은 기본이고 앤이 내뿜는 좋은 에너지 때문이다. 어쩐지 앤 옆에 있으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어쩐지 앤 옆에 있으면 나도 덩달아 솔직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말이다.

무뚝뚝한 매슈 할아버지도, 냉정한 것 같았던 마릴라 할머니도 앤을 통해 조금씩 변화했다.

애초에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늘 감정을 숨기고, 표정을 숨기고 사는 것 같았던 이들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표정에 드러내고, 따뜻한 말을 건넬 줄 알게 되고, 다정해지는 변화.


내가 가지고 있던(지금은 책을 다 정리해서 없지만) 빨간 머리 앤 번역본은 두 개였다.

하나는 인디고에서 2008년에 출간된 것, 또 하다는 허밍버드에서 2014년에 출간된 김서령 소설가가 번역한 것.

앤은 읽을 때마다, 다시 만날 때마다 느낌이 새롭다.

아마도 읽는 내가 달라져서 일 텐데 언제 읽어도 좋은 기운이 보태지는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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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다이애나, 영원히 내 친구가 되어줄래?

친구를 사귀고, 만나는 일에 늘 서툴렀던 다는 다이애나의 고백이 무척 신선하게 느껴졌다.

아마 부러움이었을 거다.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고, 치부를 고백하는 일에 머뭇거리지 않아도 되는 관계를 만드는 일은 아마 내겐 영원한 숙제로 남을 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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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와 앤의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괜히 웃음이 난다.

첫사랑을 기억하는 느낌이랄까. 수줍음, 질투, 오해, 머뭇거림 같은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두 사람 사이 이야기 속에 담겨 있다. 멋진 남자가 된 길버트, 멋진 여자가 된 앤.

길버트와 앤이 화해하고 드디어 친구가 되었을 때, 마치 내가 첫사랑에 성공이라도 한 듯 괜히 설레었더라지.


일본에서 출간된 '빨간 머리 앤 시리즈'의 삽화를 그린 저자의 이야기와 그림을 통해 잊고 지냈던 '앤'을 다시 만나 반가웠다.


"앤 이야기는 어린 시절에 읽어도 재미있고, 나이가 들어서 읽어도 그때마다 생각거리를 줍니다. 몇 번을 되풀이해서 읽더라도 똑같은 대목에서 웃거나 울곤 합니다(저자의 말 중에서)"라고 적은 저자의 말에 공감하면서, 저자가 발췌한 이야기의 한 대목에서, 그린 그림을 보면서 나 역시 웃거나 울었다.


앤의 이야기는 기쁜 마음으로 읽을 땐 그 감정이 배가 되고, 슬픈 마음으로 읽을 땐 어쩐지 그 슬픔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마법을 종종 내게 부렸다.


나는 좀 더 솔직해질 수 없었을까.

좀 더 당당하게 말할 수 없었을까.

어린 시절 내가 앤을 읽으면서 했던 대부분의 생각은 그랬다.


아이가 조금 더 크면 (아직 어른이 되기 전) 꼭 같이 읽고 싶은 책, 같이 만나고 싶은 주인공이다.

앤의 모습을 아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앤의 이야기를 통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너무 궁금하다.


다시 만난 앤은 마냥 귀엽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 노래가 절로 나온다.

한 장면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아마도, 앤을 귀여워할 만큼 내가 자란 모양이다.

내겐 추억이 된, 어느 시절을 그리워하게 만든 소중한 시간이었다. 책을 읽는 잠깐 동안의 시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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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 앤을 좋아합니다>> 저자 다카야나기 사치코 / 출판 위즈덤하우스 / 발매 2019.04.19.



덧붙임.


1. 삽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선물 같은 책일 될 것 같다.

발췌된 이야기들도 좋지만, 중간중간(꽤 많이) 들어 있는 그림들은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2. 잊고 있었는데 다시 떠오른 한 부분.

자신에게 말라깽이에 못생겼다고 말한 린드 부인에게 발을 구르며 외치던 앤의 모습 말이다.

"아주머니, 정말 싫어요. 싫어 죽겠어요. 어떻게 나한테 말라깽이에 볼품이 없다는 말씀을 하실 수 있어요? 어떻게 주근깨투성이에 빨간 머리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어요? 아주머니처럼 품위도 없고 예의도 없고 마음이 없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만약 내가 아주머니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아요? 뚱뚱하고 못 생기고, 상상력이라고는 한 톨도 없을 것 같다고 말이에요. 이런 말 들으면 기분 좋으시겠어요? 내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빠졌다고 해도 난 아무렇지도 않아요."


쉬지도 않고 내뱉던 앤의 모습. 내 속이 다 후련해졌던 장면. 지금 생각해도 속이 시원하다. 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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