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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그녀 Aug 01. 2020

한번쯤 이혼을 생각해 본 당신에게

- 언제든 원할 때 이혼할 수 있는 상태로 


혼자 구청에 가서 이혼 서류를 가지고 온 적이 있습니다. 

큰 아이가 태어나고 일 년쯤 지났을 때였어요. 

겉으로 보기엔 별 문제없어 보였지만 직장생활과 돌쟁이 아이 육아를 병행하면서 안으로는 곪을 대로 곪아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랑은 결혼 전과 그리 달라진 것 같지 않는데 저만 가족의 평온함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하필이면 직장 업무도 과중되던 시기여서 야근이 이어졌고, 아침이면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출근해서 퇴근 후에 다시 아이를 찾아 집으로 돌아오는 반복된 생활에 지쳐가고 있기도 했고요.      


포옹은커녕 따뜻한 말 한마디 나눌 여유 없이 그 시간들을 보내면서 ‘우리가 부부 맞나’ ‘이 남자가 내가 7년 동안 연애한 그 남자가 맞나’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서류에 적을 이혼사유를 빈 노트에 적어보았습니다.      


성격차이?

육아문제?

시댁과의 불화?

배우자의 외도?

경제적 결핍?     


적다 보니 뚜렷한 이혼 사유가 없어서 절망했습니다.       


그제야, 아무 이유 없이도 큰 사건이 없이도 이혼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모든 문제가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부부도 있을 수 있겠지만 겪고 보니 아주 사소한 불씨 하나가 ‘이혼’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겠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저는 제 부모의 이혼에 대해서도 다시 이해하게 되었어요.      


괜찮아 보이는 부부이더라도 문제는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다는 걸,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다 괜찮은 건 아니라는 것도요.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절망의 시간들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이제 다시 떠올려 보면 딱히 떠오르지 않아요. 아마, 늘 그랬듯 조금 참고, 대충 넘기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갔겠지요.     

 

그럼에도 이혼 서류를 챙겨 구청에서 나서던 날의 저의 모습이 가끔 생각납니다.   

   

‘나’라는 여성의 존재와 ‘엄마’라는 역할 사이에서 무던히 헤매던 모습. 


저는 그날의 저를, 기억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시간은 다 지나가, 시간이 지나면 그것도 다 추억이 될 거야, 같은 선배 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언젠가 그런 말을 여유롭게 내뱉을 수 있길 바랬습니다. 그리고 얼마쯤은 그런 시간이 제게도 찾아왔어요.      


둘째가 태어나기 전, 큰 아이가 여섯 살쯤 되었을 땐 육아도, 직장생활도 할 만해졌고, 그제야 ‘나’라는 사람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일들, 엄마로서가 아닌 한 사회적 인간으로서 누리고 싶은, 갖고 싶은 ‘나’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희망에 부풀기도 했습니다.     

 

계획에 없었던 둘째를 임신하고, 한동안 아이를 낳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면서, 다시 신생아 육아를 시작하면서 그 이전보다 더한 외로움과, 우울, 절망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나’를 꺼내는 일이 영원히 불가능할 것처럼 여겨져서 사소한 일에도 울컥 눈물이 났지요.    

  

그리고 그 감정들은 오롯이 저 혼자 견뎌내야 하는 몫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간신히 속마음을 털어놓았던 지인에게 들은 첫마디는 “신랑은 뭐하고?”였습니다.  

    

신랑 역시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도 아빠가 처음이니 시시때때로 감정이 널뛰는 아내를 보면서, 야근이 이어지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육아에 참여하면서 애쓰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차라리 엉망진창 제 멋대로 하는 사람이었다면 화라도 내고, 싸움이라도 걸었을 텐데 ‘당신도 참고 있구나.’ 싶으니 제대로 대화를 시도하는 것조차 겁이 났습니다. 

괜히 서로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을 털어놓다가 더 감정이 상할까 봐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혼자 꾸역꾸역 마음을 다잡으면서, 입을 닫고 책으로 도망치면서 ‘이혼 서류’는 다이어리 속에 고이 접어 넣어두었지만, 이혼 후의 제 삶에 대해 생각하는 날들이 많아졌습니다.      


‘만약 이혼을 하고 혼자라면 어떨까.’


그러나 애초에 불가능한 가정이었지요.

제게는 양육해야 하는 두 아이가 있었으니까요. 

그 아이들을 제 삶에서 도저히 빼내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아이 때문에 이혼을 하는 게 두렵다는 엄마들의 고백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 ‘나는 이제 진짜 엄마 구나.’ 깨달았습니다.      


‘아, 나는 이제 이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구나.’ 느꼈을 때, 절망하기도 했지만 어떻게 하면 이혼하지 않고 잘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성들은 엄마로서의 삶을 후회하는 것이지 아이 그 자체를 후회하는 것은 아니라고 뚜렷하게 구별 짓는다. 엄마가 아니고 싶어 하는 동경에는 자녀가 없는 상태도 포함된다. 하지만 이 소망이 이미 태어난 아이들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 오나 도나스 <<엄마 됨을 후회함>> 중에서 p109」


오나 도나스의 문장은 정확했어요.    

   

‘엄마 이전의 ‘나’는 이제 없다.‘ 그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인정해야 했습니다.      

저는 많은 여성들이, 엄마들이 그 사실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그래야 그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어요. 


그 시간들을 건너며 알게 된 것은,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삶과 아이의 삶을 동일시하고, 명확한 사유 이를테면 폭력, 도박, 외도 같은 배우자의 부정한 행위 앞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희생을 강요당하고 인내하며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 시대에는 ‘엄마’들에게 참는 게 미덕이었던 시절이 있었잖아요. 오죽하면 결혼하면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이라는 말이 있었을까요. 참고 인내해서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엄마들은 존경받아야 마땅한 존재였지요.     


물론 그들의 삶은 존경받아야 하지만, 지금 우리가 그 삶을 답습하며 살 필요는 없잖아요. 

    

아이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듯, 부모 역시 아이에게 귀속된 존재가 아닙니다. 아이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에게 ‘정상 가족’을 물려주고 싶다는 바람으로 참고 인내해야 하는 삶이란 얼마나 불행할까요.     

                 Image by pasja1000 from Pixabay                            


통계청에서 발표한 2018년 이혼건수는 10만 8,684건입니다. 같은 조사에서 혼인건수는 25만 7,622건이었지요. 인구 천명 단 이혼 건수는 2.5건, 결혼 건수는 5.0명. 극단적으로 표현해 이혼하는 사람들 중 반은 이혼을 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어요.      


그럼에도 여전히 ‘이혼’을 ‘이혼가정’을 바라보는 시각은 삐딱하고, 이혼한 부모는 자식들에게뿐 아니라 부모에게도 마치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당당하지 못하게 되죠.      

이혼가정에서 자란 저 역시 이혼한 부모를 둔 아이의 삶이 어떤지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경험했습니다.      


이혼가정에서 자란다는 건 나이에 비해 굉장히 의젓하구나, 하는 말을 듣게 되는 일이고 

(다른 아이와 똑같이 행동해도) 잘 자랐구나, 하는 말을 듣게 되는 일이고, 때때로 괜히 주눅 드는 일이고......     


개개인마다 차이는 분명 존재하겠지만, 제가 느낀 몇몇의 감정들을 떠올려보면 

'다른'이라는 단어가 주는 주눅 듦이었던 것 같습니다.      


친구네 집과는 '다른'

평범한 가정과는 '다른'      


이제는 ‘다른’이라는 의미를 특별함까지는 아니지만 자연스러운 의미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요. 이혼 전 부모의 싸움을 보며 불안에 떨었을 때보다 각자 새로운 삶을 살며 편안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본 게 덜 불행했던 것 같거든요.      


우리는 모두 ‘다른’ 개인이고, ‘다른’ 가족의 모양을 가지고 살아가잖아요. 

초등학교 학생들에게도 가르치는 ‘다른 거지 틀린 게 아니야’라는 말이 여전히 어른들의 세계에서 가르쳐야 할 의미라는 게 때론 절망스럽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당당하게 이혼하기 위해 여자들이 갖춰야 할 것들이 너무 많지요. 

두려움, 사회적 편견, 외로움 같은 것들보다 가장 큰 문제가 경제적 자립일 거예요.   

   

경제적 자립을 위해서는 부모 중 한 명이 아이들을 양육할 수 있는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일할 수 있는 시간에 아이들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하고, 여성들이 일자리를 얻기 위해 투자해야 하는 시간이 줄어들어야 하고, 어렵게 얻은 자리에서 쉽게 물러나지 않을 수 있는 구조가 뒷받침되어야 해요.      

여성들이, 엄마들이 일하지 못하는 사회라면 아무리 육아정책 개선을 위한 정부의 노력은 무의미하지 않을까요.    

  

저는 당당하게 이혼을 하자는 게 아니에요.      


이혼이 여성들의 삶에서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주변 시선 때문에, 아이 양육 때문에, 경제적 문제 때문에, 마치 정상가족에서 이탈하는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더 큰 고통 속에서 참고 인내해야 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월 날씨의 『결혼 고발』이라는 책에 이런 문장이 있어요.  

    

「내가 원할 때 언제든 이혼할 수 있기를 바란다. 경제력을 의존한다는 건 내 삶을 저당 잡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행동반경, 자유와 독립은 주로 돈에 의해 좌우된다. 나는 결혼이 아니어도 여성이 자립할 수 있고 사회경제적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동일 능력 동일 커리어'가 실현되어, 여성이 원할 때 결혼하고, 이혼하고, 원하는 사람과 아이를 낳고 원하면 혼자서 혹은 원하는 사람과 아이를 키울 수 있기를 바란다. 사월 날씨 <<결혼 고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언제든 이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닐까 싶어요. 

그런 상태가 된다면, 여성들은 이혼을 하든, 하지 않든 지금보다는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혹시 지금 당신 앞에도 아직 작성하지 못한 이혼 서류가 놓여있지는 않은지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이혼 사유란에 적을 뚜렷한 이유가 없어 절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유미 작가의 『홀딩 턴』이라는 소설 속에 누구나 그렇듯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 부부가 등장해요. 그들 역시 비슷한 이유로 갈등을 겪다가 별거를 해요. 그러다 결국 이혼을 결심하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결혼에 대해, 결혼한 부부에 대해, 그 관계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저는 종종 결혼한 부부는 결국 잠재적 이혼 부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누구든, 언제든 부부라면 선택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라고. 

때로는 사소한 이유로도 헤어질 수 있는 게 부부라는 생각, 반면에 그래서 또 그냥 그 사소함에 사소함을 덮어가면서 살아가게 되는 게 또 부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요.      


이 소설 속 부부 역시 열렬하게 연애했고, 사랑했던 시간이 있었고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결혼 생활을 유지하던 시간도 있는 어디서나 있을 법한 부부의 모습이지요.      


「사는 게 이런 건가. 다들 이렇게 사나. 둘러보게 되더라. 

어쩌다 한번 싸우는 게 아니라 가끔 화해하며 사는 사람들.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원수가 되거나 한집에 살면서 같이 밥을 먹는데 서로에게 가장 냉소적인 사람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한 번쯤은 꽉 막힌 수챗구멍을 뚫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섣불리 덤볐다가 역류해서 바닥이 지저분해지고 옷이 다 젖을까 봐 겁이 났다. 할 수만 있다면 피해 가고 싶었다. 네가 이혼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천천히 해나가고 싶었어.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 서유미, <<홀딩, 턴>> 중에서」 

    

가끔 그런 생각하잖아요.      


"사는 게 이런 건가. 부부가 뭔가. 다른 집도 이러나" 뭐 이런 생각들요.   

   

「심각한 상태는 아닌 것 같은데 꼭 헤어져야 해?

그 질문들은 그동안 지원이 이별한 사람들에게 던졌던 것이라는 점에서 예측 가능했다. 그 입장이 돼보니 말의 온도가 달랐지만 돌려받을 차례가 된 거라고 생각하면 야속하거나 섭섭하지 않았다. 

살다 보니 누군가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러서 신뢰가 깨지고 그 때문에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고 부수고 머리끄덩이를 잡고 서로 죽일 듯이 싸워야만 헤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같은 집에 살면서도 대화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않고 서로의 뒷모습을 보며 적의가 담긴 눈길을 쏘아대는 순간 헤어짐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서유미, <<홀딩, 턴>> 중에서」     


헤어짐이 꼭 심각한 상태이지 않아도 가능해진다는 게 때론 부부 사이의 일 같아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부부만 그런 게 아니라 어쩌면 사는 게, 산다는 게 그냥 사소한 일일지도 몰라. 같은 생각들을 해보게 됐거든요.     

 

그러고 나면, 아주 잠깐은 지금의 이 별로인 감정들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사랑도, 이별도 거창한 게 아니라는 것. 그러니 너무 겁먹지 말자는 다독임, 위로, 공감 같은 거요.      

한번쯤 이혼을 생각한다고 해서 그 부부가 잘못 살고 있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남이 아닌 자신의 삶에 대해 어쩌면 조금 더 솔직하게,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된 건지도 몰라요.      


그러니 우리, 스스로를 한 번 믿어 봐요.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건 맞는 선택일 테니까요.                                                                                                                                                                                                                                                                                                                                                                                                                                                                                                                     



■ 글 속에 소개된 책 


* 오나 도나스 <<엄마 됨을 후회함>>

* 사월 날씨 <<결혼 고발>>

* 서유미 <<홀딩, 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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