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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그녀 Jul 30. 2021

2. 글을 왜 쓰고 싶어요?

2000년 1월, 문예창작과 입시 면접시험에서 면접관 한 분이 내게 던진 질문이었다.


(멍해져서 잠시 침묵)

“저는, 어렸을 때부터 글 쓰는 게 좋았습니다. 글을 쓰면 제가,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고르고 골라 더듬거리며 그 비슷한 대답을 했던 것 같다.

당시 문예창작과의 시험은 실기 60%와 면접 40%의 점수를 합산해 고득점 순으로 선발했다. 

실기 때문이었든 면접 때문이었든 그해 입시에서 운 좋게 합격을 했다.

입학한 뒤에 동기들과 모여 면접 때 "무슨 질문했어? 나 그때 말 무지 못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합격의 기쁨을 누렸던 것 같다. 오래도록 그 질문이 나를 따라다닐 거라 짐작도 못하고.


스무 살 면접에서 받았던 그 질문은 20년이 지나 사십 대가 되어서까지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녔다.


 ‘나는 왜 글이 쓰고 싶을까?’


대학 입학 이후 십 년이 넘게 소설을 썼다.

 ‘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즐거움’은 소설을 쓸 때 가장 크게 느꼈다. 어떤 인물을 만들어 내도, 어떤 상황을 만들어도 ‘소설’이잖아,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매력에 빠져 있었다. 

같은 목표를 가진 동기들과 난도질 수준의 소설 합평을 마치고 학교 앞 맥주집으로 우르르 몰려가 창작의 고통에 대해 밤새 토론할 때 진짜 작가인 것 같은 착각에 빠졌던 것도 같고.


졸업 후 누군가는 정말 등단이라는 걸 했고, 누군가는 대학원에 진학했고 누군가는 취업을 했다. 모두 한 방향을 바라보고 달렸지만 모두 그곳으로 갈 수는 없었다. 먼저 나간 이들을 뒤에서 바라보는 일은 생각보다 더 큰 상처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나는 취업을 했고 18년째 직장인으로 살고 있다. 동기들의 등단 소식을 들으며 축하의 말을 건네면서도 마음 어딘가에선 한숨을 쉬었던 날도 있었고, 애꿎은 결혼과 출산을 핑계로 대며 그래서 내가 못 쓰는 거지! 괜한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 (세상에 아이 양육하며 일하며 글 쓰는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데!)


글쓰기 모임 새로운 기수가 시작되면 나 역시 비슷한 질문을 던지곤 했다.  


‘글이 왜 쓰고 싶어요?’


그렇게 질문을 던지면 다양한 대답이 나오지만, 결국 하나로 연결되는 느낌이 든다.


 ‘나’로 통하는 길,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싶다는 바람.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힘든 상황에 주저앉지 않고, 

현실을 피하지도 않으며 ‘나를 가장 나답게 지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사진 출처 : 픽사 베이  


글을 쓸 때마다 주위 환경이 재배치되었다. 이혼이 불행한 게 아니라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견고한 사회가 불행하다는 것, 여자의 도리를 따라야 하는 게 아니라 성별 이분법과 그에 따른 차별과 배제가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면했던 나의 입체적인 면도 생생하게 살아났다. 나는 학교 밖 청소년이었기에 일찍이 제도권 밖에서 살아갈 다양한 방식을 모색할 수 있었고 정상 궤도를 이탈했기에 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각을 기를 수 있었다. 나는 이혼한 집 딸, 전문대 출신,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라는 몇 가지 단어로 간편하게 설명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밀크티와 공포영화, 비 오는 날, 동물, 따뜻한 대화,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책 읽는 걸 좋아하고, 뭔가 이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자주 우울하고, 주기적으로 모든 걸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어 하는,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무엇이었다. 쓰는 과정을 통해 나는 배웠다. 사람은 몇 가지 키워드로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확실한 존재라는 사실을.

- 홍승은,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승은 씨에게 쓰는 일은 어떤 의미인가요?> 중에서. / 어크로스, 2020」


글을 쓰면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 힘들다고 말하는 멤버들이 있다.

나 역시 종종 그런 감정을 느낀다. 굳이 드러내지 않으면 그럭저럭 괜찮아 보일 수도 있는데,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텐데 하는 감정들. 혹은 누가 볼 수(읽을 수)도 있으니 적절히 포장하고 싶은 마음까지.


그러나 쓰면 쓸수록 드러내고 싶다는 욕망이 커졌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얇은 막 한 겹만 벗겨내면, 

또 한 겹만 벗겨내면 어쩐지 진짜 ‘나’라는 사람을 스스로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를 완전히 까뒤집어 드러내 보여야 ‘글’이 되는 건 아닐 거다. 더욱이 그게 좋은 글이라고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거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그렇게 한 커플을 벗겨내고 나니 그 이전과는 다른 ‘내’가 된 것 같은 굉장한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는 거다. 


나를 드러내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글쓰기


일부러 드러내는 게 아니라 드러내야 할 순간에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싶다.

쓰는 일은 용기를 내는 일이고, 그 용기는 나를, 당신을, 우리를 조금 더 자유롭게 할 거라 믿는다.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물었다.

 

"왜 쓰느냐고."

"글이 왜 쓰고 싶냐고."


이제 그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왜 쓰지 않냐고."

"글이 왜 쓰고 싶지 않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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