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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그녀 Jun 29. 2019

우린, 멋진 꿈을 꿀 거야.

 - 강병융, <<도시를 걷는 문장들>>을 읽는 밤

                                                                                                                                                           

16개월 둘째가 수족구에 걸렸다. 

"어린이집에 수족구 걸린 아이가 있습니다"라는 공지를 받은 지 이틀 만이었다. 

처음엔 열이 나고, 발부터 수포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이의 칭얼거림은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잠시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처음엔 아이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시작해, 아- 이번 주는 휴가 내기 어려운데, 아- 엄마한테 또 부탁해야겠다. 

아- 힘들다.. 혼자 있고 싶다.. 이런 감정들로 변해가면서 수시로 감정이 가라앉았다. 

간신히 아이가 잠들고, 혹여라도 깰까 봐 집 안의 모든 불을 끄고 나니 뭔지 모를 슬픔이 몰려왔다. 

누구에게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러니 그게 슬픔인지, 아픔인지 나조차도 실은 잘 모르는 감정이었다. 

조용히 스탠드를 켜고 방 한쪽에 웅크리고 앉아 더듬더듬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이 책은 그렇게 내게 왔다. 


도시를 걷는 문장과,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돌아다니는 문장과, 마음속의 설명할 수 없는 문장들이 뒤섞여 처음엔 길을 잃은 여행자처럼 갈팡질팡거렸다. 천천히 뒤섞인 문장들을 조합했다. 그건 내 역할이 아니라 이 책이 해주었지만. 

길을 읽은 여행자를 두렵지 않도록 달래면서 천천히 그 길을 찾아주었다. 


그냥 인생은 그대로 인생이다. 지독하게 자연스러워 지독해서 운명이라고 말해버리고 나면 오히려 괜찮아지는 그런 운명의 인생. 소설의  결과가 과하게 슬프거나 극단적으로 처절해도, 읽는 이의 삶이 그보다 더 슬프거나 처절해서 공감은 되어도 나의 감정은 변하지 않는 상황을 깨달으며 폴란드 맥주 한 잔 들이켰다.
- <인생은 인생, 맥주는 맥주> 중에서 / '폴란드 포즈난에서 이은선의 <<발치카 N0.9>>를 읽다




인생은 그대로 인생.

의미를 부여한다고 그 인생이 더 풍요로워지는 것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그 인생이 허무해지는 것도 아닌데, 엄마가 된 뒤의 내 인생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이 있다. 자주 있다. 

마치 엄마가 되어서 내가 나이지 못하게 된 것인 마냥. 

마치 엄마가 되어서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지 못한 것 마냥.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어쩌면 '나'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나의 감정'에 대한 핑계. 


폴란드 맥주 한 잔, 아니 그냥 하이트라도 한 캔 따 마시고 싶은 순간이었다. 


여행에 관한 책을 읽고 쓰는 리뷰마다 반복해서 적는 말이 있다. 

"나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라는 고백 아닌 고백. 내게 여행은 두려움이고, 낯섦이고, 번거로움이다. 

그럼에도 "여행"에 관한 책을 찾아 읽는다. 심지어 좋아한다. 대리만족이라기보다는 나는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상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먼 훗날, 어쩌면 가볼 수도 있는 곳.  

그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곳을 걷고 있을 나의 모습을 상상하는 일이 내겐 일종의 여행인 셈. 


이 책 속에 담겨 있는 문장들과, 도시들을 상상하면서 큭큭 웃는다. 

조금 전까지 극한의 우울에 치달을 수도 있었던 내 감정은 어느새 고요해졌다. 심지어 유쾌해지려고 했다. 


이 책에는 작가가 찾은 '한 문장'과 작가가 찾은 '한 장소'가 글마다 삽입되어있다. 

위의 사진은 작가가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서 찾은 한 장소다. 

'정말 별것 아닌 조형물'이지만 브라티슬라바에서 이 조형물을 못 보면 크게 후회할 거라는 작가의 한 문장에 나는 왜 큭큭 웃음을 터트렸는지. 그 덕분에 한없이 슬픈 것 같았던 조금 전의 마음은 희미해지고 조금씩 유쾌해지고 있었다. 

아마, 상상했을 거다. 

저 아저씨를 만나 손을 한 번 쓰윽 만져보는 상상. 그리고 기념으로 사진을 같이 한 장 남기는 상상. 


사람이란 본디 다른 이들의 기쁨도, 슬픔도 온전히 공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냥 어디선가 배운 대로 공감하는 척, 함께 웃어주고, 울어주는 척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인간적이라고 믿어왔다. 무엇보다도 공감하는 척하기 위해선 내가 먼저 행복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내가 불행해지는 순간, 다른 사람의 슬픔을 보듬을 여력은 사라져 버린다고. 내 행복과 불행이 늘 가장 크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행불행이 보일 리 없다고. '나'는 절대 '우리'의 동의어가 될 수 없다. 작지만 내 것을 찾아야지. 인간답게, 인간다운 척 살기 위해선 우선 내가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비엔나에서 에곤 실레를 기다리며 카프카를> 중에서  /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다


나는, 공감하는 척, 웃어주는 척, 울어주는 척하는 게 힘들었다. 그걸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러는 내 모습이 어쩐지 진짜 같지 않아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인간적일 수 있다는 조금 빨리했더라면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누군가의 행불행 앞에서 나는 늘 입을 쉽게 열지 못했다. 진짜 공감은 그게 아니라고 믿었다. 때론 나의 믿음이 너무 가볍다. 어쩌면 그랬을까. 내가 먼저 행복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의 슬픔을 보듬을 여력이 없었을까. 내 행복과 내 불행이 늘 가장 커서. 아직 난 내 것을 온전히 찾지 못했을까. 여전히 누군가의 기쁨과 슬픔 앞에서 조금 망설이는 걸 보면. 


나는 "온갖 종류의 편견을 가지고 있(47쪽)"었을지도. 
보통의 에로티시즘이 음침하고 잔인하지만 그 책의 그것은 밝고 우아한 것처럼, 남아메리카의 가난은 보통의 그것과 달리 음침하고 잔인한 대신 밝고 우아했을 수도 있는데. 다만, 그것을 내가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데. 
섹스만 다루는 에로티시즘이 무가치한 것처럼, 남아메리카 사람들을 자본의 눈으로만 본 나의 관점이 무가치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페루의 가난한 사람들은 일과를 마치고, 행복한 마음으로 '친구들'과 어딘가로 가고 있었는데, 그들의 표정을 제대로 보지 못한 내가 그것을 일상의 고됨으로 해석했을지도 모른다. 파라과이 소년들은 학교에는 가지 못했지만, '축구공'하나로 온전히 행복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르헨티나의 빈민촌에 지붕은 없었지만 '햇볕'이 있었고, 볼리비아의 소녀는 전기 대신 학구열이 있었고, 새벽을 여는 할머니는 추위를 이길 알파카의 포근함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그렇게 다들 각자의 무언가가 있었는데. 나는 태평양의 햇살 아래서 그런 생각들을 했다. 어쩌면 내가 본 모든 것들은 껍질일지도 모른다는. 어쩌면 내가 생각한 모든 것들이 껍질일지도 모른다는. 
(중략)
내가 그들의 행복과 열정과 요염과 유머에 대해 정의 내릴 자격이 있을까? 행복도, 열정도, 요염도, 유머도 그들의 마음에서 출발한다. 삶을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면, 어쩌면 더 행복해질지도 모르고, 더 열정적이 될 수도 있으며, 사람들이 더 요염하게 느껴지고, 더 쉽게 웃고, 웃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스쳐가는 바람이 그것을 정의할 순 없다. 
- <다시, 리마> 중에서 / 페루 리마에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새엄마 찬양>>을 읽다 p195



작가는 이 책을 '리마'에서 읽었다고 했다. 

게다가 '다시, 리마'라고.  나는 '리마'에 가 본 적이 없지만 한 번도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다시, 리마'라는 말 앞에서는 어쩐지 그곳을 그리워하게 됐다. 가본 적도 없는, 그곳을 그리워하게 되다니. 

그들의 행복을, 열정을, 요염을, 유머를 상상하다가 그리워하다가 다시 나의 행복으로 귀결된 이 밤이 어쩐지 또 언젠가는 그리워질 것 같다. 


누군가의 삶에 대해, 그들의 일상에 대해, 혹은 남루함에 대해 누구나 품을 수 있는 편견이 있다. 

상식적인 편견(물론 이건 아주 좋지 않은 편견이다). 이를테면 내가 사는 도시에 유독 많이 모여사는 우리가 가난하다 생각하는 나라에서 온 많은 노동자들을 볼 때, 그들의 삶을 내 기준에서 내 맘대로 정의 내렸다. 늦은 밤 동네에 모여 자기들 나라의 언어로 대화하면서 담배를 피우는 그들의 모습을 볼 때, 그들의 손을 잡은 어린아이들을 볼 때, 누구의 허락도 없이 타인의 고달픔을 정의 내렸다. 

문득 그들에게도 있을 행복과 열정과 요염과 유머에 미안해졌다. 


한참, 이 책에 빠져 있는 사이 아이는 여러 번 뒤척였다.  일어나 울음을 터트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지금 나의 이 여행은 성공적이다. 

상상 속에서 가능할 여행들이지만 상상하다 보면, 꿈꾸다 보면 책 한 권 옆에 끼고 유럽의 어느 도시를 여유롭게 걷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핀란드 투르쿠에서 토베 얀손의 <<마법사가 잃어버린 모자>>를 읽은 작가가 찾아낸 한 문장처럼 말이다. 

"아니야, 

우린 멋진 꿈을 꿀 거야. 

그렇게 꿈을 꾸다가 잠이 깨면 봄이잖아."

                                                                                                                                                                  

 <<도시를 걷는 문장들>> /  저자 강병융 / 출판 한겨레출판사 / 발매 2019.05.30.



덧붙임


1. 수족구에 걸려 어린이집을 가지 못한 아이는 일주일 동안 꼬박 할머니(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았다. 

내가 언젠가 꿈을 꾸듯, 꿈을 이루듯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된다면) 그 여행의 동행자는 꼭 엄마이면 좋겠다. 


2. 2019년 5월 유럽의 작은 도시에서 작가는 적었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내가 갔던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진다면, 내게 감동을 줬던 책들이 읽고 싶어 진다면 저자로서 더없이 행복할 테지만, 더 바라는 바는 여행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여행법을 찾는 것이다. 또 책 읽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자신만의 독서법을 찾는 것이다(p7)"

나는 지금, 작가의 행복에 조금 기여한 듯하다. 괜히 조금 뿌듯하다. 


3. 언급된 책을 읽지 않고도, 그 책에 대한 글을 읽을 때 어려움이 없는 독서 에세이는 매력적이다. 그러니 이 책이 내게는 충분히 매력적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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