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 <일간 이슬아>를 읽는 밤
비록 안 웃기기는 해도 그를 사랑할 이유는 아주 많다. 나랑 맞담배를 피우니까. 사시사철 내 노브라를 지지하니까. 무엇보다도 매일 부지런히 삶을 맞이하는 사람이니까. 그는 휴일에도 일찌감치 일어나 담배를 피우며 똥을 사고 샤워를 한다. 그리고는 검고 숱 많은 머리를 깔끔히 넘긴 뒤 한 시간 넘게 베이스 기타 연습을 한다. 아마추어 직장인 밴드에서 베이스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아빠가 둥둥거리는 와중에도 엄마는 곤히 늦잠을 잔다. 아빠에게 예술적 재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뭔가를 날마다 꾸준히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예술적 재능은 오히려 엄마에게 있다. 하지만 그녀가 날마다 뭔가를 꾸준히 연습하는 일은 드물다. 해다 중천에 뜰 때쯤 연습을 마친 아빠는 "복권 사러 가야지~"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가 매주 5천 원씩 로또를 산 지는 십 년이 넘었다. 그에게 있어 희망이란 무엇일지 나는 잘 모르겠다. 현관문을 나서면서 아빠는 밖에 버려야 할 재활용 쓰레기 두 봉지 챙겨서 나간다. 내가 아는 희망은 오히려 거기에 있다. 재활용 쓰레기를 잘 분류하고 때맞춰 버리는 모습 말이다. 아빠가 현관문을 닫는 소리에 엄마가 깬다. 그녀는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을 뚝딱 차린다. 이것은 주말 낮마다 반복되는 풍경이다.
오늘 아침 엄마는 아빠에게 장래희망을 물었다.
아빠가 되물었다.
그걸 고민하기엔 좀 늦은 것 같지 않아?
엄마는 장래희망은 어느 나이에나 유효한 질문이라며 생각해보라고 했다.
아빠는 생각해보더니 건물 관리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정확히는 딸이 하는 건물의 관리인을 하고 싶댔다.
아빠에겐 딸은 있지만 건물을 없다. 그는 50대 초반이고 노동해야 할 날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웅이의 건투를 빌며 나는 그저 내 월세를 열심히 벌고 있다.
<일간 이슬아> 2018.03.06.火 중에서, p78
슬이~ 오늘은 무슨 자랑할 거냐?
그럼 나는 망설이지 않고 웅이에게 오늘의 자랑을 늘어놓는다. 자랑을 하루라도 거르면 몸살을 앓는 인간이라서 그렇다. 자랑할 게 하나도 없는 그런 하루란 무수히 많다. 그런 날에 코딱지만 한 자랑거리라도 찾아낸다. 오늘 아침의 쾌변, 인스타그램을 무려 하루나 하지 않은 것, 턱걸이를 3개월째 연습하고 있는데 아직 한 개도 못하지만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것, 편의점에서 담배를 살 때 아직도 신분증 검사를 받는 것, 데이팅 어플에서 매칭 된 사람과의 우스운 채팅 내용 등 부모 앞에선 하찮은 일도 자랑이 될 수 있다.
허파에 바람 든 사람처럼 자랑을 늘어놓고 나면 하루를 시작할 마음의 균형을 찾게 된다. 이 배설을 한 후에야 그나마 멀쩡한 사람으로 하루를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의젓하게 원고를 마감하고 글쓰기 수업을 하러 전국 각지로 출근하고 초딩과 중딩과 고딩을 만나고 이삼사오십 대의 여자들을 만나고 글을 쓰고 만화를 그리고 인터뷰를 하러 나갈 정신이 겨우 드는 것이다.
허영과 광기를 맘껏 드러내도 되는 상대가 부모인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이런 나를 받아주는 사람이 세상에 둘이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내 자랑이 끝나면 웅이는 오늘의 유머 속 유머를 전한다. 복희는 어제 망원시장에서 본 웃긴 사람 얘기를 전한다. 그리고 각자의 하루 일정을 공유한 뒤 우리는 헤어진다. 이 작은 일과가 내가 온 힘을 다해 지켜내고 싶은 일상 중 하나이다.
<일간 이슬아> 2018.04.04. 水 중에서, p125
이곳에서 여러 검사와 진료를 받았다. 자궁 경부암 검사, 성병 검사, 질염 검사, 자궁 초음파 검사, 방광염 치료 등. 그리고 각종 피임법에 관한 상담을 받았다. 콘돔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고 피임약 복용을 하면 응급실에 실려갈 만큼 부작용이 심해서였다.
많이 번거로우시죠?
의사 선생님이 다정하게 물었고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네! 번거롭고 부담스러워요.
우리는 콘돔도 피임약도 아닌 피임법을 모색해 보았다. 선생님은 나에게 임플라논 시술을 제안하며 말했다.
임플라논 삽입하면 흡연을 못하시는데, 괜찮으세요?
아뇨... 안 괜찮을 것 같아요.
선생님은 좀 더 고민하시더니 루프 삽입 시술을 제안하셨다. 자궁 안에 피임 장치를 넣어 수정란이 착상되는 걸 막는 피임 방법이었다. 흡연자도 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루프 시술에 관해 공부해보고 여러 후기들을 읽어보았다. 복희와 웅이와 애인과 이야기를 충분히 나눠본 뒤 시술을 받기로 결심했다. 저렴한 시술비는 아니었지만 향후 3년 동안 임신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지불할 수 있는 돈이었다.
시술을 받기로 한 어느 봄 날에는 애인과 같이 산부인과에 갔다. 로비에서는 다시 마지막 섹스가 언제인지를 물었고 나는 이번엔 거짓말하지 않고 대답했다. 소파에 앉아 내 이름이 불리길 기다리는 도안 애인은 물을 떠다 주고 손을 주물러주었다. 걔는 나보다 표정이 더 굳어 있었는데 시술이 아플까 봐 무척 걱정스러운 듯했다. 진료실에는 혼자 들어갔다. 나는 선생님의 손을 잡고 말했다.
초대한 안 아프게 넣어주세요!
그럴게요!라고 선생님이 대답했다. 여느 때처럼 무시무시한 의자 위에 앉아 M자 모양으로 다리를 벌렸다.
시술은 경우 2분 동안 진행되었다. 짧고 간단한 시술이었는데, T자 모양의 작은 기구를 질을 통해 깊숙이 넣어 자궁까지 넣는 그 과정은 한 마디로 존나게 아팠다. 그런 통증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고통이 있었다. 맘 편한 섹스를 위해서 이만큼의 통증과 비용을 감수하는 난 아무래도 미친년인 것 같았다.
정말 잘 참으시네요. 수고하셨어요.
선생님이 수술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로비로 어기적 어기적 걸어 나가자 애인이 초조한 얼굴로 일어섰다. 약을 처방받고 걔 손을 잡고 집에 갔다. 몸이 회복되자 나는 이렇게 외칠 수 있었다.
이제 몇 년간 아무도 날 임신시킬 수 없다!
이야기를 들은 여자 친구들은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 이제 무적이구나!라는 말도 덧붙였다.
<일간 이슬아> 2018.08.24.金 중에서, p454
해피 아워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독감을 다시 끙끙 앓으며 나는 기억해 내.
돈이 없어서, 혹은 돈은 있어도 시간이 없어서, 혹은 돈도 시간도 없어서, 혹은 돈도 시간도 있는데 마음이 없어서, 혹은 마음이 있긴 있는데 엇갈려서, 우리는 행복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에 자주 실패해. 내 맘이 당신 맘과 다르고, 자꾸 눈을 피하고, 우린 서로 모르고, 그게 제일 그렇지 뭐. 그 밖에 수많은 이유들로 쉽게 언해피 아워를 보내. 행복이라는 희귀한 순간이 얼마나 우리 손에 잘 안 붙잡히는지 붙잡았다가도 어느새 달아나 있고 의도치 않은 순간에 습격해서 놀래키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해피 같은 말에 딱히 집중하지 않게 된 지 오래야. 이제는 그저 아워를 생각해. 섣부른 기대와 실망 없이 의젓하게 시간을 맞이하고 흘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평생 못 될 것 같지만 말야.
<일간 이슬가> 2018.03.28.水 중에서, p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