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이름', '잊지 않을 이름'

-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을 읽는 밤

by 목요일그녀


2002년 나는 대학 졸업반이었다.

신춘문예, 문예지, 그게 뭐든 등단을 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득 품고 있었던 습작생이었고.

졸업을 앞두고 응모했던 <대산 대학문학상>에서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칫, 내 소설이 어때서? 다른 애들은 얼마나 잘 쓰는데?' 이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면서 당선작을 찾아 읽었을 때,

슬프게도 나는 바로 인정했다.


그때 그 당선자가 김애란이었다. 당선작은 <노크하지 않는 집>.


나와 동갑내기였던, 출생 도시가 같았던 그 당선자의 이름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과장을 아주 조금 보태 내게 처음 소설에 대한 좌절을 느끼게 했던 이름이었다.


첫 소설집, 그 이후의 작품들을 모두 찾아 읽으면서 내 생각은 이렇게 바뀌었다.

잘 쓰는구나 - 우와- 소설은 노력보다 재능인가 봐. - 나는 포기해야 하나 - 아니 어떻게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왜 이 작가가 느끼고 본 세상은 나랑 이렇게 다른 거지

등등등.


그러다 보니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애정과 질투가 반쯤 섞인 감정을 느끼곤 했는데 그보다 나 혼자만 느끼는 어떤 친밀감 같은 게 늘 따라다녔다.


같은 시대를 살아도 자신이 담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에 따라 바라보는 세계가 달라지고, 생각을 담는 크기가 달라지고, 시선이 달라진 다는 걸 자연스럽게 인정하게 되기도 했다.



점심때면 '맛나당'에 수많은 손님과 더불어 그들이 몰고 온 이야기가 밀물처럼 들어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국수는 '빠른 음식'이라 면이 퍼져도 국물이 식어도 안 됐다. 그곳에서 나는 여러 계층과 계급, 세대를 아우르는 인간군상과 공평한 허기를 봤다. 요리가 미덕이고 의무이기 전에 노동인 걸 배웠고, 동시에 경제권을 쥔 여자의 자신만만함이랄까 삶이 제 것이라 느끼는 사람의 얼굴이 긍지로 빛나는 것 또한 봤다.
(중략)
언젠가 어머니에게 '갑자기 왜 국수가게 할 마음을 먹었느냐'라고 물은 적이 있다. 어머니는 어떤 계기로 '저라다 남편이 죽을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다. 내가 다섯 살 무렵 어머니는 '그래도 아들이 있어야지'라는 할머니의 청을 거절하고 아이를 더 낳는 대신 국수가게를 차렸다. '본가에 들어와 살림과 농사를 맡으라'는 요구 또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삶을 꾸렸다. 어머니가 종일 밭을 매고 고추를 따는 사이 하루 두 번 씻겨 늘 깨끗하던 우리 몸에 이가 생기는 걸 목도하고서였다. 어떤 관계에서는 '식구니까' 혹은 '식구끼리'라는 말이 줄곧 일방통행으로 쓰인다는 걸 깨닫고서였다. 어머니는 훗날 삶이 자신의 긍지를 무너뜨리고, 멱살을 쥐어 잡고 흔드는 와중에도 각기 다른 지역에서 공부하던 세 딸의 학비와 방세, 생활비를 모두 대셨다. 그러면서 한 번도 우리에게 생계를 책임자란 말을 하지 않았다.
'맛나당'은 내 어머니가 경제 주체이자 삶의 주인으로 자의식을 갖고 꾸린 적극적인 공간이었다. 어머니는 가방끈이 짧았지만 상대에게 의무와 예의를 다하다 누군가 자기 삶을 함부로 오려 가려할 때 단호히 거절할 줄 알았고, 내가 가진 여성성에 대한 긍정적 상이랄까 태도를 유산으로 남겨주셨다. 나는 내가 본 게 무엇인지 모르고 자랐지만 그 공간에 밴 공기를 오래 쐬었다.
고3 여름방학 때 나는 사범대학에 가라는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고 몰래 예술학교 시험을 봤다. 그건 내가 부모에게 한 최초의 거짓말은 아니었을지라도 결정적 거짓말이었다. 나를 키운 팔 할의 기대를 배반한 작은 이 할, 나는 그게 내 인생을 바꿨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내다 그런 결정을 내릴 때까지 내 몸과 마음을 길러준 팔 할, 갈수록 뼈가 닳고 눈과 귀가 어두워져 가는 그 팔 할에 대해서도 자주 생각한다. 어릴 땐 꿈이 덤프트럭 기사였고, 아는 것 적고 배운 것 없지만 '그게 다 식구니까 그렇지'라는 말로부터 멀리 달아나셨던 분, 그렇지만 아주 멀리 가지는 못하신 분. 내겐 한없이 다정하고 때로 타인에게 무례한, 복잡하고 결함 많고 씩씩한 여성. 그리고 그녀가 삶을 자기 것으로 가꾸는 사이 자연스레 그걸 내가 목격하게끔 만들어준 칼국수집 '맛나당'이 나를 키웠다, 내게 스몄다.
- < 나를 키운 팔 할은> 중에서



이 책의 맨 첫 글인 <나를 키운 팔 할은>의 일부분을 다시 옮겨 적으며, 다시 생각한다.

이 책은 이 글 한편을 읽은 것만으로도 다 읽은 것 같다고. 충분하다고.


자신의 삶에 대해, 자신을 구성한 어떤 공기에 대해, 바람에 대해, 공간에 대해, 시간에 대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

<나를 키운 팔 할>에 대해 자연스럽게 떠올려 보게 하지만, 도무지 그 팔 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내게 스민 어떤 것들에 대해 다정하게, 때론 담백하게, 때론 고백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좋겠구나 싶다.


책 속에 실린 글들은 작가가 십여 년 이상 써 온 글들을 묶어 놓아서 이런저런 계기로, 다른 지면에서 읽은 글들도 있었다.

그래도 다시 읽었다. 천천히 처음 읽는 듯이.


자연스럽게 나이 먹어 간다는 것에 대해, 고요하기도 하고 부산스럽기도 평범한 날들에 대해, 말에 대해, 사람에 대해, 관계에 대해, 오래 전의 나에 대해, 미래의 나에 대해, 지금의 나에 대해, 그리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굳이 생각하려고 마음먹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언어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글이 가지고 있는 힘.


나는 부사가 걸린다. 나는 부사가 불편하다. 아무래도 나는 부사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나는 이 말을 아주 조그맣게 한다. 글 짓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부사를 '꽤' 좋아한다. 나는 부사를 '아주' 좋아한다. 나는 부사를 '매우' 좋아한다며, 절대, 제일, 가장, 과연, 진짜, 왠지, 퍽, 무척 좋아한다. 등단한 뒤로 이렇게 한 문장 안에 많은 부사를 마음껏 써보기는 처음이다. 기분이 '참' 좋다.
- <부사와 인사> 중에서


지금은 고요한 새벽이고, 아이들은 모두 잠들었다.

술을 마시고 들어 온 신랑도 오랜만에 일찍 잠이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온전히 나 혼자다.

그러니까 내가 무슨 말을 혼자 중얼거려도 누구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는 뜻.

그럴 때 나는 혼자 '혼잣말'을 한다.


이 글을 읽고 혼자 앉아 노트북 자판을 타닥타닥 두드리며 혼자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부사에 대해서.

'아름답게, 행복하게, 예쁘게, 상냥하게, 온화하게, 멋지게, 부드럽게, 따뜻하게, 포근하게, 다정하게......'

어쩐지 마음이 폭신해지는 기분이다.

기분이 '참' 좋다.


10년 전, 서른다섯 살의 선배는 책에 이렇게 적었다. (여기서 말하는 선배는 소설가 김연수다)
- 내가 바다를 건너는 수고를 한 번이라도 했다면 그건 아버지가 이미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쉬운 말 같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이처럼 단순한 말들을 어렵게 이해해가는 과정의 연속인지도 모르겠다. (중략)
결국 우리가 청춘에 대해 말한다는 건 아버지에 대해 말한다는 것과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어머니 또는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그리고 그게 한 시절 우리를 그토록 빛나게 한 여름의 속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자 새삼 궁금해졌다. 시간은 대체 어떻게 생긴 걸까? 인생은, 삶은 때때로 우리 앞에 어떤 얼굴로 나타나나?
- <여름의 속셈> 중에서


나이를 먹어가고 있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지금의 내 나이, 마흔에 들어서면서 부쩍 '나이 먹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어떤 사람으로 나이 먹고 싶은지, 지금보다 더 시간이 지난 뒤에 내 앞에 나타 날 '나이 먹어버린 나'에 대해.


책을 덮고, 노트북 전원을 끄고, 곤히 잠들 아이들 사이로 끼어들어가 눕는 장면을 떠올린다. 애써 떠올리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내게 스민 소소한 행복.

천천히 읽으면서 생각하면서 기다리면서 보낸 새벽의 이 시간이 훗날 내게는 잊지 못할 이름이 될 수도 있겠다.

어쩌면 '잊기 좋은 이름'은 '잊지 못할 이름', '잊지 않을 이름이 아닐까.'


아이들의 얼굴을 쓰다듬고, 볼에 뽀뽀를 하고, 발로 다 차 버린 이불을 슬쩍 덮어주면서 우리가 잊지 못할, 잊지 않는다면 좋은 어떤 장면 하나를 마음에 담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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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기 좋은 이름>> / 저자 김애란 / 출판 열림원 / 발매 2019.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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