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은유, <다가오는 말들>을 읽는 밤

by 목요일그녀

말을 잘(많이) 하는 사람,

말을 잘(많이) 들어주는 사람,

듣기도 잘하고 말도 잘 하는 사람.


굳이 고르자면 나는 언제나 잘 듣는 사람이고 싶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진짜 내 것이 아닌 지어낸 이야기를 하는 듯한 순간이 많았고(어쩌면 아는 체하고 싶었거나, 있어 보이고 싶었거나 이지 않았을까), 말을 하고 난 뒤의 기분보다 누군가의 말을 많이 들어 주고 난 뒤의 기분이 훨씬 좋았다(물론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런데 잘 듣는데도 기술이 필요하고, 연습이 필요하다는 걸 또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말을 잘 하는 것도, 잘 듣는 것도 내게는 여전히 참 어렵다.

출처 <픽사베이>
딸과 엄마는 서로에게 멀고도 가까운 타인이다. 주변의 성소수자 친구들도 엄마에게 커밍아웃 하는 것을 마지막 과제로 남겨둔다. 성폭력 피해 경험을 엄마에게 말하는 딸은 드물다. '돌싱녀' 친구들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나서야 엄마에게 통보한다. 그건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효심과 자신의 감정노동을 최소화하려는 계산이 포함된 고도의 전략이다. 덜 진실한 태도는 아니다. 자식의 정체성 투쟁에서 엄마가 최후의 관문인 건 분명해 보인다.
- <친구 같은 엄마와 딸이라는 환상> 중에서, p24 / 함께 소개된 책,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요즘 나의 대화 상대는 대부분 큰 딸 예윤이다. 여덟 살 딸아이와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고,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너무 솔직하게 말해도, 어정쩡하게 얼버무려도 아이는 금세 알아차린다(대체 내가 여덟 살 때도 그리 똘똘했을까). 아이의 말을 듣다 보면 중간에 말을 끊고 내 말을 하고 싶어 근질거리는 순간을 참아내야 하기도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반응을 보여야 한다. 대화를 나누는 일이 즐거움이자 괴로움이라면 너무 과장일까.


엄마와 딸이 친구 같은 사이가 될 수 있을까, 여전히 내게도 의문문으로 남아 있는 질문이다. 아이가 좀 더 자라서 어른이 된 뒤에 그때 나는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는 있을까.



나와 누군가를 연결하는 '말'에 대해 생각한다.

요즘 나의 세계는 두 아이와 신랑으로 이루어진 가족과 하루 9시간 이상을 보내는 직장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그 안에서 웃고, 울고, 슬퍼하고,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

자주 그 세계가 답답해서 벗어나고 싶지만 또 자주 그 세계 때문에 안도하고 감사함을 느낀다.

'타인'에 대해 공감하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주변의 세계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 외로워지기도 하지만 지금의 내 세계가 깨질까 더 안으로 꽁꽁 숨어들기도 하는 이중적인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다는 건 분명 축복받은 재능이다. 공감은 경험을 기반으로 하고, 사랑을 나눌 줄도 받을 줄도 알아야 하며 무엇보다 진심이 앞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론 진심을 가장한 공감이 상대에게 더 큰 상처를 주는 경우를 종종 봐왔기 때문에 내게 늘 '공감'이라는 말은 내뱉기 어려운 말 중 하나.


은유 작가의 이번 책 『다가오는 말들』은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리고 각 글마다 작가가 읽은 책(글의 글감이 되어준)들이 소개되어 있다.


책을 읽고, 책에 대한 글을 쓰는 것, 그 글에 대한 단순한 리뷰가 아닌 자신의 삶과 연결한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자주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최근 읽은 몇 권의 비슷한 주제의 책들을 읽으며).


생각을 많이 해야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하고, 주변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봐야 가능한 일인 듯싶어서 더 부러워지는 지점이기도 하고.

'생일은 가족과 함께'라는 사회규범은 유니폼처럼 거추장스럽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함께하는 사람들이 정해져 있다는 게 인간 행복의 관점에서 온당한지 잘 모르겠다. 외부가 없는 삶은 숨 막힌다. 평소에도 밥을 같이 먹는 식구인데 굳이 생일에도 모여야 하는지. 아마도 평소엔 밥상을, 생일엔 잔칫상을 받았던 아버지를 위한 가부장 문화의 잔재가 아닐까 추측한다. 그 수혜자가 아닌 뒷수발 드는 '안'사람 처지에서는 가족 '바깥'이 선물이다.
엄마가 되고 나며 사라지는 권리들. 자아실현이 좌절되는 것이나 경력단절보다 먹고 자고 누는 기본 생식 활동에 제동이 걸리는 게 나는 더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호텔 요리를 먹어도 아이가 옆에 있으면 맛을 느끼지 못했다. 아이를 두고 나오면 걱정되고 데리고 나오면 성가시고. 첫 숟갈을 뜨려는 찰나 아이의 '응가' 한마디면 식사의 흐름이 끊긴다. 밥이 허용되지 않는 엄마의 시간. 그뿐인가. 백화점 여성용 화장실 칸 내부에는 접이식 아기 의자가 달려 있다. 몸을 못 가누거나 멋대로 돌아다니는 영유아를 동반한 고객을 위한 장치다.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도 아이를 그림자처럼 달고 다녀야 한다.
- <엄마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중에서, p55 / 같이 소개된 책 우에노 지즈코 외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큰 아이를 다 키워놓고(혼자 화장실 가는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로), 둘째를 낳고 나니 모든 게 다시 시작되었다.

하나가 아니라 큰 아이까지 다시 시작된 기분이었다. 혼자 잘 가던 화장실도 엄마랑 가겠다고 하질 않나, 혼자 잘하던 젓가락질도 자기도 서투르니 먹여달라고 하질 않나. 하- 매일매일 욱! 하는 감정이 불쑥 드는 날들이 많았다(아니, 현재진행형이다). 엄마입니다만, 그게 뭐!라는 말은 나 역시 아주 자주 목으로 삼키는 말이다. 특혜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차별 혹은 힐끔거림 정도라도 피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엄마들끼리 모이고, 엄마들과 아이들이 함께 갈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해야 하는 모든 행위들이 자주 불편하게 느껴진다. 아이를 데리고 나서는 길엔 더 조심하게 되고, 아이에게 더 잔소리를 하게 되기도 하고. 소개된 책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는 꼭 읽어보고 싶어졌다.


'노키즈존'이라는 말을 보고 철렁했다. 개인의 시간과 공간이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를 내세우며 식당이나 카페에서 아이들 출입을 금한다는데 그 논리가 옹색하다. 우리는 누군가의 시공간을 침해하면서 어른이 됐다. 여전히 힘 있는 어른들은 자기보다 약한 자의 시공간을 임의로 강탈하면서 자기를 유지한다. 왜 아이들을 대상으로만 권리를 주장하는 걸까? 그래도 되니까 그럴 것이다. 나 역시 양육의 책임을 나누지 않는 어른(배우자)에게 가야 할 원망이 애꿎은 아이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나곤 했으니까.
인간 사회는 민폐 사슬이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사회성을 갖는다. 살자면 기대지 않을 수도 기댐을 안 받을 수도 없다. 아기를 안고 공부에 나선 엄마처럼 폐 끼치는 상황을 두려워 마라야 하고 공동체는 아이들을 군말 없이 품어야 한다. 배제를 당하면서 자란 '키즈'들이 타자를 배제하는 어른이 되리란 건 자명하다. 건강한 의존성을 확장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관계에 눈뜨고 삶을 배우는 어른이 될 수 있다.
- <노키즈존은 없다> 중에서, p100


엄마의 입장에서 이 문장은 대체로 와닿았지만, 누군가는 격하게 반대할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배제를 당하면서 자란 키즈들이 타자를 배제하는 어른이 되리란 건 자명하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니 되도록이면 노키즈존이라는 '말'이 그런 인식 자체가 아이들에게 심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어른들이 일방적으로 만든 '아이들이 없는 공간' '아이들은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라는 말로, 구분으로 혹여나 괜히 상처받는 아이들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어른)가 좀 더 조심하면, 좀 더 배려하면 되지 않을까.


한 사람의 공감 능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계속 질문하는 중이다. 여자라서, 아이를 키워봐서, 딸이 있어서처럼 저절로 주어지는 것들은 계기가 될 순 있어도 공감의 지속 조건은 될 순 없다. 배움이 필요하다. 글쓰기 수업에 오는 어른들도 '느끼는 능력'을 갈구한다. 남 일에 무관심하면 더 빨리 더 높게 사회적 성취를 일굴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자신과의 서먹함이나 관계 맺기의 무능함으로 인해 삶의 다른 한쪽이 허물어지는 탓이다.
내가 아는 공감 방법은 듣는 것이다. 남의 처지와 고통의 서사를 듣는 일은 간단치 않다. 자기 판단과 가치를 내려놓으면서, 가령 '왜 이제 말하느냐' 심판하는 게 아니라 왜 이제 말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해하려 애쓰면서, 동시에 자기 경험과 아픔을 불러내는 고강도의 정서 작업이다. 온몸이 귀가 되어야 하는 일. 얼마 전 본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당신이 할 말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들을 준비를 할 거예요."
- <딸 없으면 공감 못하나> 중에서, p128


얼마 전, 나의 마음과는 다르게(아니 어쩌면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지나치다 싶게 많이 내뱉곤 후회했다.

하지 않았으면, 하지 말았으면 좋았을 말들이었던 것 같아서 후회했고, 상대의 말을 더 많이 들어주었더라면 하고 후회했다. 결국 (나 때문은 아니지만) 그 상대는 조직을 떠났고 나는 남았다. 떠난 자보다 남겨진 자가 감내해야 할 몫이 더 크다는 걸(특히 직장 조직 내에서는) 느낄 수 있었던 뼈저린 경험이었다.


공감에 앞서 (나는 네 말이 공감할 거야)라는 의식적인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이건 어쩌면 내가 내내 바꾸고 싶은 나의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일종의 자기만족이다. 그래서 나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누군가의 말에, 누군가의 삶에 공감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늘 어렵고 두렵다.


여성혐오로 인한 죽음, 그리고 성폭력 피해는 주식 시세나 날씨처럼 매일 생산되는 뉴스다. 한샘 기업 내 성폭력 사건이 폭로된 게 불과 몇 달 전이고,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진 게 2년 전이다. 누구도 들어주지 않아서 서사가 되지 못한 채 눈송이처럼 흩어져 버린 힘없는 여성 피해자들이 이야기는 반도의 땅 곳곳에 설산을 이루고도 남는다.
우리가 무서워해야 할 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페미니스트가 가리키는 여성이 처한 현실의 참담함이다. 여자는 밥하려고 태어나지 않았고 꽃처럼 꺾어도 되는 존재가 아닌데 밥 안 하냐고 죽이고 꽃 꺾듯 존엄을 꺾어버리는 무수한 사건들에도, 우리는 계속 놀라고 말리고 떠들고 분노해야 한다.
- <페미니스트보다 무서운 것> 중에서, p134



조금씩 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이는 일 중 하나가 아닐까.

두 아이(딸)을 키우다 보니 예전보다 조금 더 여성들의 '삶' '안전'에 대해 생각하고 예민해진다.

나의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하고, 이해시켜야 할지 고민한다.

그런 걸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는 그들의 생각에, 그들의 행복에 작은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았다고 해서 모른척하지 않는, 나는 아니겠지 하고 쉽게 넘기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부모와 산다고 다 행복하지 않듯이 부모가 없다고 꼭 불행하지 않다. 복지시설에서 사는 열다섯 살 아이의 비밀이 아픈 것이지, 그 아이의 삶 자체가 슬픈 것은 아니다. 아침에 학교에 가고 아이들 좋아하고 친구들이랑 싸우고 떠들고 치마 기장 줄이기에 연연하며 핸드폰 카톡에 정신이 팔려 있는 모습은 또래 아이와 다르지 않다. 부모의 부재를 무조건 동정하거나 차별하는 시선만 아니라면 아이가 기죽을 일도, 거짓으로 둘러댈 일도 없다.
한 아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타인의 돌봄이다. 그 타인이 꼭 부모일 필요는 없다. 부모이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인간은 나약하고 흔들리는 존재다. 자식을 낳는다고 남을 돌볼 수 있는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상태가 자동으로 세팅되지는 않으며 세팅되었다고 한들 영원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아이는 무조건 친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식으로 혈연을 강조하고 모성에 대한 환상을 부풀리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된다"
한 아이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든 신체적 온전함과 존엄성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후원금을 척척 내는 어른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부모님 뭐 하시느냐' 다짜고짜 묻지 않는 어른이 많아져야 하고 이력서에 가족관계를 쓰지 않도록 하는 제도가 생겨야 한다. 이 세상에 '불쌍한 아이'는 없다. 부모 없이 자란 자식이라는 굴레를 씌우고 불쌍한 아이를 만들어내는 집요한 어른들이 있고, 정상가족이라는 틀로 자율적 존재를 가두거나 배제하는 닫힌 사회가 있을 뿐이다.
- <불쌍한 아이를 만드는 이상한 어른들> 중에서, p162 / 같이 소개된 책 김희경 <이상한 정상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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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나쁘게도 나는 가끔 아이에게 그런 말을 했다(간혹 아이가 너무 자주 무언가를 사달라고 할 때, 지나치게 말을 안 들을 때). "세상에는 엄마 아빠가 없어서 힘들게 사는 친구들도 있어. 그래도 너는 갖고 싶은 거 거의 다 가지고 있고, 사고 싶은 거 대부분 사주잖아." 같은 말들.

이 말이 얼마나 이기적으로 나쁜지 인식한 뒤로 절대 아이에게 이런 뉘앙스의 말을 하지 않지만 여전히 그때의 내가 나는 부끄럽다.

이건,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부모가 있는 아이, 없는 아이를 나모 모르게 구분 짓고, 그 아이들을 가엾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일 거다.


책을 통해 배우고, 누군가의 글을 통해 배우면서 나는 여전히 조금 더 괜찮은 어른이,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오늘도 한 발짝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나의 아이는 편견 없이 자라길 바라면서 나는 가지고 있던 무수히 많은 편견들이 자주 부끄럽다.


작가의 말에서

"<<다가오는 말들>>은 겪은 일, 들은 말, 읽은 말들로 엮은 에세이 모음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나 편견이 많던 한 사람이 타인을 이해하고 더 않은 생각을 만들어가는 성장의 기록이자 그러지 못했던 날들의 반성문이다. 나에게서 남으로, 한발 내디뎌 세상과 만난 기록이다. "라고 적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누군가의 반성문이 나의 반성문이, 누군가의 기록이 나의 기록이 되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또 배운다. 그리고 또 다짐한다.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자고.

편견 없는 사람이 되자고.

괜찮은 사람이 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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