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필요한 건 기다려주는 마음

- 심은보, 여희영 <<오늘도 학교에 갑니다>>를 읽는 밤

by 목요일그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아이는 한 학기 내내 학교에 가는 걸 너무 힘들어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처음엔 그 이유가 알고 싶어서 아이에게 계속 물었다.


"그냥 싫어"

"자꾸 공부만 하라고 해서 싫어."

"놀지도 못하고 조용히만 하라고 해서 싫어."

"재미가 없어."

"그냥 학교 완전체(이런 말은 어디서 배우는 건지)가 싫어."

그때마다 아이의 대답은 조금씩 달랐지만 결론은 같았다.


나.는. 학. 교. 가. 싫. 어.


학기 초 아이 담임선생님과의 상담 때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예윤이는 굉장히 안정감이 느껴져요. 다른 아이들보다 의젓해서 제가 부탁을 많이 해요. 자기가 할 일을 알아서 잘하더라고요."


그때 나는 그 말을 그냥 기분 좋은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일하는 엄마지만, 매일 잘 챙겨주진 못하지만 그래도 아이가 잘하고 있구나 싶어서 안도했다.


선생님의 말과 다르게 아이는 매일 힘들어, 싫어, 재미없어라는 말을 달고 다녔다.

가끔 내가 지칠 땐 아이의 그 말이 듣기 싫어 나도 모르게

"그럼, 가지 마 학교!"하고 날 선 말을 하기도 했다(ㅜㅜ)


나도 초등학교 1학년 엄마는 처음인지라 여전히 아이의 마음을 어떻게 달래줘야 할지, 이해해 줘야 할지 헤매고 있다.


아이들이 꾸며 놓은 교실 앞면에는 '이곳에 귀하지 않은 삶은 없다'라는 글자가 제각각의 모습을 한 모자이크로 붙어 있어요. 저는 특별한 존재가 되기를 강요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너희는 특별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어요. 다만 자기 자신을 아주 귀하게 여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삶을 통해 해 주고 싶어요.
- 첫 번째 편지 <잘하고 싶어 하는 마음, 살피는 마음> 심슨 선생님의 편지 중에서, p9
도은이는 다른 사람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요.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발달장애'라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호비를 좋아하고, 고기와 김을 좋아하고, 채소는 잘 안 먹고, 눈을 잘 안 맞추고, 대답을 잘 안 하고, <아기 염소> 노래를 좋아하고, 달리기는 엄청 빠르고, 공 패스를 잘하는 귀여운 도은'이지요. 도은이는 수업 중간에 크게 노래를 부른다거나 갑자기 교실을 나가거나, 순식간에 사라져서 찾으러 다니는 일이 많아요. 그래도 초록이들(반 아이들)이 함께 살펴 주고 살뜰하게 도와주어서 잘 지내는 편이에요.
그렇지만 저의 고민은 도은이가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불러도 대답이 없거나 눈 맞춤이 어렵고, 주변 사람에게 통 관심이 없어요. 대부분의 수업 활동도 관심이 없기는 마찬가지여서 함께할 만한 것들을 찾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도운이가 학교에서 지내는 것이 행복할지, 뭘 하면 즐거울지, 뭐가 도움이 될지 고민하고 있어요.
- 첫 번째 편지 <잘하고 싶어 하는 마음, 살피는 마음> 에리카 선생님의 편지 중에서, p14



이 책은 혁신학교로 지정되어 있는 공립학교 교사(심슨 선생님)와 대안학교(성미산 학교) 교사(에리카 선생님)이 일 년간 편지를 주고받으며 나눈 교육 현장의 이야기이자, 그곳에서 매일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고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다.


고백하자면,


첫 편지를 읽는 순간부터 마음이 이상해지고 말았다. 적절한 표현을 찾기 어렵지만 뭐랄까 진짜? 이런 학교가, 선생님이 있어? 싶은 마음과, 부럽다 하는 마음, 그런 것들이 뒤섞인 감정이었달까


지극히 평범한(다고 생각되는) 초등학교를 다닌 나는 그 시절 선생님 혹은 학교생활에 대해 그리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만난 할아버지 선생님은 자주 아이들을 때렸다. 3학년 때 만난 여자 선생님은 늘 무서운 표정과 말투로 아이들을 대했다.

사랑을 받는다는 느낌, 학교 안에서의 생활이 소중하다는 느낌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가 학교가 싫어,라고 말할 때.... 그래, 학교는 싫지, 하고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심슨 선생님이 있는 죽백 초등학교는 2011년 혁신학교로 지정되면서 교사와 학부모, 아이들이 함께하는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수업, 삶이 담긴 수업'을 기조로 교과와 학급, 학년, 교실, 학교와 마을을 넘나들며 다양한 방식의 수업이 이루어진다.

매주 금요일 '자기 계발의 날'을 운영하고, '계절학교'라는 이름으로 티볼, 탁구, 인라인 같은 운동 활동과 천연 염색, 목공, 사진 같은 활동들을 진행했다.

'아침 해맞이'로 아이들은 학교에 오면 운동장에서 놀이를 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중간놀이'로 10시 30분부터 11시까지 온전히 아이들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에리카 선생님이 있는 성미산 학교는 서울시 마포구 성산동에 있는 12년제 대안학교다. 앎의 자립, 삶의 자립, 협력과 연대를 통해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사람을 기르고자 노력한다. 초등 저학년(1~2학년)에서는 '성미산'의 자연 생태와 '성미산 마을'의 사회 생태를 배우면서 '생태적 감수성'을 기르는 것에 집중한다. 초등 고학년(3~5) 학년에서는 의식주 생활의 기본이 되는 '살림'프로젝트를 통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 가는 법, 즉 삶의 기본기를 익힌다. 중등(6~10학년)에서는 '전환과 마을'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구성한다. 포스트 중등(11~12학년) 과정에서는 '생태적 전환'이라는 맥락에서 자신의 삶을 설계하는 데 중점을 둔다. 마을에 좋은 일자리를 만들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들을 만들며 생태적 삶을 지속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을 만드는 것에 중점을 둔다.




한글, 수학, 한자, 영어로 이루어진 교육과정이 아니라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삶이 담긴' '연대'와 '자립'을 중심에 두는 교육이라니.

마치 딴 나라 이야기를 드는 것 같은 순간이 불쑥불쑥 찾아왔고, 글 속의 아이들은 정말 행복하겠구나. 매일 학교 가는 일이 기대되고 즐거울 수도 있겠구나 싶어 졌다.


비장애인 아이들과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서로 보듬어주고 함께 생활하는 공간. 그 공간에서 배운 아이들은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어쩌면 어른인 나보다도 바르고 깊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특히 조금 느린 아이를 서로 도와 함께 지낸다는, 도은이의 이야기는 멋지다는 생각과 함께 역시 부럽다...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나는 아이가 공부를 잘하길 바라지는 않는다. 영어나 수학학원에 일찍부터 보내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런데 적당히, 다른 아이들이 하는 만큼은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가끔은 매일 TV를 보는 아이에게 "넌 언제부터 공부할 거야?"라고 묻기도 하고 은근히 "그러다 너 다른 아이들보다 안 똑똑해지면 어떡해.." 하는 말을 했던 것도 같다.


비교의 대상이 너무 많고, 엄마들은 늘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다른 아이가 하는 것을 내 아이도 해야 하지 않을까 같은.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데 아이가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할까, 더 즐거울까, 더 삶이 풍요로워질까 하는 생각은 얼마나 많이, 자주 했을까.

잠깐 함께 하는 시간만으로 내가 할 일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아이가 어린이집, 유치원을 거치면서 한 반에 많게는 스무 명 이상의 아이들을 보살펴야 하는 선생님들이 정말 힘들겠구나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 아이 한 명도 이리 힘든데... 그 많은 아이들을... 이런 생각.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좋은 선생님이면 좋겠다. 이런 욕심도 부렸고.

그런데 심슨 선생님이나 에리카 선생님 같은 선생님은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아이들 옆에서, 아이의 눈높이로, 누구 한 명도 포기하지 않고 보듬어 주는 선생님에 대해. 서로 모여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더 행복할까 고민하는 선생님들에 대해.


그리고 덧붙여진 욕심. 아, 우리 아이도 그런 선생님을 언젠가 한 번은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제가 아이가 잠들기 전 누워 이렇게 말했다.

"엄마, 우리 선생님은 있지. 진짜 소리를 많이 질러. 근데, 나는 그 소리가 너무 듣기가 싫어."

그때 나는 아마 "선생님도 힘드실 거야. 너희들이 너무 말을 안 들으니까"이런 식의 대답을 했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그게 사실일 수도 있다. 아이 반의 학생은 30명이다.

선생님 한 명이 보살피기엔 너무 많은 수이기도 하고, 제각기 개성이 있는 아이들일 테니 매일 소리를 지르게도 되지 않을까.

이해하고, 안타까우면서도 그래도 좀 다정하면 좋았을 텐데.. 이런 생각이 든 건 내 욕심이겠지 생각했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아이 탓을 하는 어른들이 불편해졌어요. 물론 모든 것이 어른들의 탓이라는 단순한 결론 역시 아니고요. 그건 아마도 작년의 특별한 경험이 준 선물이 아닌가 싶어요. 어른들이나 아이들이나 모든 생명은 최선을 다해 잘해 보려는 마음이 있어요. 실수를 하거나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잘해 보려는 마음'이 '진짜'가 아닌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의 역할은 아마 그 생명이 잘하려고 하는 마음을 도와주고 살피는 데 있지 않을까요? 포장지는 거칠어도 그 속에 담긴 마음을 안다면 우리는 소중한 것들을 조금 더 잘 볼 수 있게 되겠지요. 아이들의 행동을 긍정하고, 그 의지를 수용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고 돕는 것, 적절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 다그치지 말고 부드러운 눈으로 다정하게요. 저도 아이들을 만나면서 그렇게 조금씩 다듬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 두 번째 편지 <쓰면 쓸수록 커지고 많아지는> 에리카 선생님의 편지 중에서, p30


굳이 선생님이 아니라도, 엄마가 아빠가 우리 어른들이 조금만 더 부드러운 눈으로 다정하게 아이를 바라봐 준다면 어떨까.

엄마가 돼서 배운 많은 것들 가운데 '아이를 통해 나도 자란다'라는 게 참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이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아이가 나를 다시 가르친다는 것. 아이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배우고, 지혜를 얻는다는 것.

그렇게 함께 자란다는 게 신기하고, 감사했다.


우리가 성장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종착지는 어디일까? 종착지가 있는 한 걸까? 아이들에게 성장해야 한다고 말하는 우리 어른들은 과연 성장한 것인가? 왜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정해 놓은 똑같은 기준을 향해 모두 똑같은 속도로 내달리라고 하고 있는 것일까? 모든 인간이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라면 아이들마다 성장 과정을 제대로 거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성장이라는 낱말이 넘쳐 나지만 대한민국 교육 현실은 여전히 아이들 편에 서서 성장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 일곱 번째 편지 <싫어하면 딱, 멈추지> 심슨 선생님의 편지 중에서, p113



대학에서 16년째 일하면서 대학교육에 대해, 교육부가 요구하는 대학 교육의 평가 기준에 대해 날 서게 비판하고, 취업률과 충원율로 교육의 질을 판단하는 성과주의에 대해 자주 절망한다.


요즘 교육부에서 가장 강조하는 건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다. 대학들에 끊임없이 수요자들이 원하는 교육과정, 교육 환경을 만들어 주라고 요구하고, 그것들을 실제 대학에서 어떻게 이행하고 있는지 평가한다. 그런데 정말 '수요자의 요구'가 그 안에 있는 건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학생들이 원하는 건, 취업률로, 충원율로 자신이 다니고 있는 대학을 평가하는 건 아닐 텐데 말이다.


달라지고 있다고, 달라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초, 중, 고등학교 교육 역시 현실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아이들이 원하는 교육, 학교가 되어가고 있는 걸까.


어딘가에서 교사들이 정신과 진료를 받는 비율이 굉장히 높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뿐 아니라, 학부모를 상대하고 갈수록 달라지는 아이들을 상대하는 일들 말고도 과도한 업무량에 치여 실제로 가르치고 보살펴야 할 업무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지금은 현실.

그런 현실을 개선해 주는 일, 교사들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일, 한 명의 아이라도 더 살피는 일이 학교를 줄이고, 부실 학교 롤 걸러내는 일들보다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교사들은 대안학교의 열악한 사정 탓에 경제적인 면에서 불리함을 감수하면서도 '아이의 변화와 성장에 참여하는 즐거움'을 위해 기꺼이 마음을 내고 시간을 써요. 그 노력은 때로 눈물겹기도 하지요. 아이의 성장을 위해 함께 손 맞잡고 나가는 기쁨이야말로 교사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처음과 끝인데, 슬프게도 돈 주고 물건 사듯 (대안) 교육을 소비하는 모습도 종종 보곤 해요. 부모님들은 학비로 적지 않은 돈을 내니 요구가 늘어나는 것이지요. 처음의 감동은 점점 희미해지고 당연한 일상이 되니 교사들은 다 채워 줄 수 없는 어떤 욕망에 좌절하기도 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는 것들이 부정당하는 경험을 하기도 해요. 사실 곰곰 생각해 보면 교사나 부모나 아이들의 변화와 성장이 선물인데, 왜 자꾸 잊는 걸까요? 소비자가 아니라 함께 좋은 것을 찾아가는 동료라는 것을요. 새삼 학교를 교육을 함께 가꾸어 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미루고 뭔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찾고자 하는 것들, 그 소중한 것들을 분별하는 눈을 잃지 않고 그 순간을 볼 줄 알고 전할 줄 아는 태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 아홉 번째 편지 <특별한 안경> 에리카 선생님의 편지 중에서, p171



입학 후 처음 부모 참여 수업 전에 아이들에게 자신의 꿈이 뭔지 적어오라는 숙제를 내주었다.

그걸 부모님들 앞에서 한 명씩 발표하는 게 참여수업의 주제였다.

예윤이는 숙제를 앞에 두고 쉽사리 연필을 들지 못했다.


"엄마, 나는 꿈이 뭔지 모르겠어."라는 아이의 말에 나도 잠시 고민했다.

뭐라도 적어야지 않을까, 아닌가 뭐라고 말해줘야 하지?


"근데, 엄마 아무것도 안 적도 괜찮나?" 아이가 먼저 다시 물었다.

"그래, 솔직하게 적자."


결국 아이는 "저는 아직 제 꿈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저것 경험하면서 제 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적었다.

그리고 그날, 그렇게 발표를 했다.

다른 부모님들의 웃음과 와~ 하는 박수소리에 나는 조금 안도했다.

그날 꿈을 모르겠다고 말한 아이는 예윤이 한 명이었다. 다행히 아이는 주눅이 들거나 속상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아이는 자신의 꿈이 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꿈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기 이전에, 아이가 꿈을 가질 수 있도록 많은 것을 생각하고, 경험하게 해 줄 수 있는 엄마,

잘 놀게 해 주고, 잘 놀았다고 함께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엄마,

아직 꿈이 없다고 해서 "넌 왜 아직 꿈이 없니"라고 말하지 않는 엄마,

아이가 선생님, 의사, 과학자, 뭐 이런 꿈을 가지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지 않는 엄마가 되고 싶다.

아이의 어떤 마음도, 어떤 꿈도 그냥 응원해 주는 엄마, 그런 학교, 그런 사회를 바라면서.


모든 것이 자본의 손에 넘어가 교육도, 먹거리도, 관계와 놀이마저도 이제는 돈으로 해결하는 세상이에요. 그마저도 본능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요. 작년에 '고양이' 주제탐구를 하면서 고양이를 살펴보니 알면 알수록 신비로운 게 많더라고요. 어미 고양이는 새끼 고양이에게 사냥을 가르치면서 처음에는 죽은 쥐를 가지고 놀게 하고, 점점 살아 있는 쥐도 잡을 수 있도록 갈치고 배우게 한다고 해요. 이 모든 과정이 놀이처럼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새끼 고양이는 어미를 통해 생존의 기술들을 익히는 거죠.
사람이 살아가는 모양이 이와 비슷할 테지요. 놀이라고 하는 것은 유희이기도 하지만, 이간으로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배우는 것이고,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을 내 몸에 새기는 과정이지요. 이건 가르치는 게 아니라 보여 주는 것이고, 아이들은 배우는 것이고요. 하여 아이들의 놀이에는 인류의 지속 가능성이 들어 있어요. 그렇지만 그런 놀이를 말살해 버리고, 골목에서 사라진 아이들은 학원이며 학습지로 온종일 종종 거리고, 차가 골목을 채워 버린 지금의 모습. 개인화되어 버린 사회, 기계와 돈의 부속품이 된 사람들, 산업사회에 필요한 도구로서의 인간을 키우려는 교육의 모슨 같은 것들의 총체적인 결과인 것이지요.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까요?
- 여섯 번째 편지 <기꺼이 망해도 좋은 곳> 에리카 선생님의 편지 중에서,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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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학교에 갑니다>> / 저자 심은보, 여희영 / 출판 서유재 / 발매 2019.07.08.




덧붙임


1. 심슨 선생님이 있는 학교에 도도라는 아이가 있다. 이미 여러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킨 아이.


도도는 금요일 학교에 오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도도 아버지는 녀석을 포기했다고 말했어요. 아이를 '또라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약값이 아까워 약도 못 먹이겠다고도 하고요. 며칠 전엔 편의점에서 물건을 훔치다 덜렸다며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학교에서 사고를 치면 경찰에 신고를 하라더라고요. 그런 도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어요.
도도는 어쩌면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마음 붙일 곳 하나 없이 혼자 이것이 외로움인지 슬픔 인지도 모르고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중일지도 모르지요. 교실이 결코 도도의 아픔을 오롯이 담아 주기 쉽지 않은 공간이라는 것을 알기에 제가 어떻게 도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가 쉽지 않네요.
사실 이렇게 여러 학교를 돌고 돌았다면 도도의 문제는 어쩌면 지역 사회가 발 벗고 나서야 할 문제이기도 할 텐데 그런 노력들이 보이질 않아 많이 아쉬워요. 언제나 모든 것은 학교로 미뤄지고 말아요.
- 어쩌면 다시 첫 편지 <함께 하는 길> 심슨 선생님의 편지 중에서, p257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에게 문제 부모가 있는 말은 어쩌면 틀린 말이 아니다. 아이는 결국 부모를 보고 배울 테니까. 부모가 포기했다고 말하는 아이는 어디로 가야 할까.

심슨 선생님은 그런 아이를 위해 많은 고민을 하고, 학부모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아이를 위해 무언가 함께 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한 명의 아이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모두 함께 보듬어 주는 일, 학교가 아이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큰 선물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함께 마음을 모아주는 학부모들이 있는 학교라면 아이들이 조금은 행복해지지 않을까.


2.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아이를 이런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안타깝다고 생각하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얼까 고민했다. 선생님들에게 많은 것을 맡기는 거 말고, 학교가 다 해주기를 바라는 거 말고, 엄마인 내가, 부모인 우리가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가져야 하는 마음에 대해.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진심이고, 그 아이들과 좋은 일을 꾸려 나가려는 마음도 진실이고, 선생 노릇 사람 노릇을 잘해야 하는 것도 진실이지만, 결국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내가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산다는 것은 말이죠. 이타적인 삶을 표방하면서 그러려고 노력하고, 삶에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나누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역시 이 모든 것은 나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 그것이 결국 돌고 돌아 나를 풍요롭게 하고, 또한 다른 사람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고요. 그러니 조금 겸손해질 것 같기도 해요. 내가 대단한 무엇을 한다는 생각은 살짝 옆에 두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매일 내게 깨달음을 주는 아이들과 잘 배워 가며 무럭무럭 자라 보겠습니다.
- 열 번째 편지 <성장은 가장 약해진 순간 찾아와요> 에리카 선생님의 편지 중에서,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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