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지 않기를

- 김혜진 <<9번의 일>>을 읽는 밤

by 목요일그녀

그가 아는 삶의 방식이란 특별할 것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어른이 되고, 자신이 자라온 것과 비슷한 가정을 꾸리고,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면서 자신이 선택한 것들에 책임을 다하는 것이었다.
만족스러운 삶. 행복한 일상. 완벽한 하루. 그런 것들을 욕심내어본 적은 없었다. 만족과 행복, 완벽함과 충만함 같은 것들은 언제나 눈을 깜박이는 것처럼 짧은 순간 속에만 머무는 것이었고, 지나고 나면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것에 불과했다. 삶의 대부분은 만족과 행복 같은 단어와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쌓여 비로소 삶이라고 할 만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고 그는 믿었다.
- <9번의 일> 중에서, p113



대부분의 가장들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나의 아버지가, 나의 이모부가, 삼촌이, 고모부가, 혹은 옆집 아저씨가 그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지 않았을까.

무엇이 일에 대한 보람인지 모른 채,

먹어 살려야 하는 식구들만 오로지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꾸역꾸역 해내면서 말이다.


가끔,

나의 아버지가 젊은 시절 가졌던 꿈을 생각해 보곤 했다.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분명 아버지에게도 꿈이 있었을 거다.

말하지 못한 꿈.

어쩌면 단 한 번도 가까이 다가가 본 적 없었을 꿈.


그런 것들을 생각할 만큼 여유로운 일상을 가질 수 없었던 나의 아버지는

일흔을 바라보는 지금도 일을 하고 계신다.

이제 곧 일을 정리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아버지는 요즘 들어 많이 느끼시는 듯했다.


나는,

일을 하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는 게 쉽지 않다.

다만, 일을 정리하고 난 뒤에라도 아버지가 매일 즐겁게. 이제라도 자신이 그리던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란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나의 일, 당신의 일, 매일 일을 하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회사가 원하는 대로, 시키는 대로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럼에도 풍족해지지 못하고, 행복해지지 못하는 삶에 대해서.


'그는 수리와 설치, 보수 업무를 담당하는 통신회사 현장팀에서 26년을 일했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랬다.


그 뒤의 그의 삶이 일한 만큼의 대가와 보람을 주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그는 점점 벼랑으로 몰리고 있었다.

실적이 좋지 않아서, 회사가 어려워서, 경제가 더더 어려워져서, 젊은 사람들을 내치는 것보다

한 살이라도 나이 많은 이를 내보내려는 회사의 방침 때문에.


그가 팀장의 호출을 받고, 타 지역으로 떠밀려 내려가고,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낯선 업무를 배정받으면서도

회사를 떠나지 못했던 건 아직 고등학생인 자식이 있고, 아직 부양해야 할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고, 아직

살아내야 할 많은 날들이 남아 있음이기도 했겠지만

자신을 만들어 준 세계가, 자신이 지탱해 온 세계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단한 행복을 바라지 않았지만,

20여 년이 넘게 자신을 '자신'답게 만들어 준 회사는 어쩌면 그 자신, 자체였을 테니까.


'노동'의 신성함에 대해 우리는 이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실업자가 최대에 이르고, 젊은 사람들조차 직장에서 내몰려야 하는 시대.

일자리를 찾지 못해 구직자인 상태로 몇 년을 등을 구부린 채 살아야 하는 시대.


개인의 잘못인지, 사회의 잘못인지 이젠 그런 것조차 거론할 필요가 없을 만큼 익숙해져 버린 시대.

어쩌면 그래서 불행한 시대.


회사가 시키면 뭐든지 한다는, 그게 뭐가 잘못된 거냐고 반문하는 소설 속 '그'의 말은 그래서 더 아프게 다가온다.


생각해보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다른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순간들이, 삶을 다른 방향으로 놓아둘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그것들을 그냥 흘려보냈다. 스스로에게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면서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자신을 막아서기만 했다. 어떻게 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 그럼에도 아주 작은 것 하나쯤은 바꿀 수 있다는 생각. 두 가지 마음이 들끓는 동안 그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둔 걸지도 몰랐다.
- <9번의 일> 중에서, p223


공감이 돼서, 이 문장 앞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누구나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출근을 하고, 내일의 출근을 준비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일이라는 게,

누구를 구원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 때문에 때론 죽음으로 내몰리기도 하는 지금의 우리가 사는 현실이 어쩐지 좀 무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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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번의 일>> / 저자 김혜진 / 출판 한겨레출판사 / 발매 2019.10.10.



덧붙임


1. 김혜진 소설가의 소설을 읽지 않을 수가 없겠다,라고 생각하게 한 또 하나의 작품이다.

<<딸에 대하여>>를 읽으면서 그 뒤 작가가 들려줄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다림은 역시 옳았다.

작가가 보여주는, 들려주는 현실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들의 깊이가, 시선이 나는 참 좋다.


2. 소설 속의 '그'에게는 이제 곧 대학에 입학하는 아들이 있다.

어쩌면 '그'를 마지막까지 버티게 할 수밖에 없을 존재. 그러나 그 아들은 자신과는 좀 다른 삶을 살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

곧 사회로 나가게 될 많은 청년들이 '일'때문에 불행해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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