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 특별한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

- 김미희 <<문 뒤에서 울고 있는 나에게>>를 읽는 밤

by 목요일그녀

책을 덮고,

노트북을 앞에 두고,

빈 여백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나는 이 글에 대해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내가 하는 어떤 말이 이 책 속의 글보다 나을 수 있을까.


아니,

단 한 줄이라도 공감을, 위로를 줄 수 있을까.


단연코 그럴 수 없을 거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나는 기어이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다.


'문 뒤에서 울고 있는' 당신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어. 세상의 기준에 어긋난다 해도 내 뜻대로 살고 싶어. 아이에게 많은 것을 줄 순 없지만, 엄마 아빠가 있는 가족과 같을 순 없겠지만 한 가지만큼은 자신할 수 있어. 하율이를 많이 사랑해. 아이도 엄마의 사랑을 믿는다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클 수 있을 거야. 아니, 아직은 모르겠어.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내 어머니가, 당신 어머니가, 나보다 세상을 더 오래 사신 분들이 내게 아이를 보고 살라고 말씀하셔. 당신이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미희야,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한 사람이야'라고 했을 거야. 오래전부터 당신은 나를 믿었으니까.
당신이 내게 남긴 게 하나 더 있어. 그건 바로 죽는 순간의 모습이야. 나도 당신처럼 죽게 될 테니, 지금의 삶이 두렵지 않아.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날 테니까. 아니 사실 두려워. 삶에 질질 끌려다니다 죽게 될까 봐.
- <수목장 편지> 중에서, p40


아이가 태어나고 1년 뒤, 남편은 신장암 수술을 받았다.


이 책 속의 글은,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신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 박현수를 기억하는 글이자,

아들 하율이와 남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아내 김미희의 이야기다.


새벽,

아이들을 재워두고 나도 잘까, 고민하다가 결국 이 책을 펼쳤을 때

눈물 콧물 범벅인 채로 거의 뜬 눈으로 아침을 맞을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이렇게 어떤 예고도 없이 마음 한편을 훅 치고 들어올 줄은 미처 몰랐다.


갓난쟁이 아들을 돌보며, 암에 걸린 남편을 돌보며

엉덩이 붙일 틈도 없이 뛰어다녔을 '엄마'이자 '아내'인 저자의 모습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시간을 누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말조차 꺼낼 수 없을 만큼 나는 그 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흘렀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불현듯 나의 이런 마음이 너무 웃기다, 미안하다,

이건 슬픈 이야기가 아닌데,

미치도록 사랑했던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인데

내가 너무 주제넘게 슬픔에 대해서만 읽어내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었을 거다.

많이 버거웠을 거다.

그러나 그보다 몇 배로 간절했을 거다. 사랑하는 그 마음이.

그리고 짧다면 짧았을 그 시간 동안 남들은 미처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의 사랑을 나누었을 거다.

그들의 마음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추억을 만들어 놓았을 거다.


그러니,

추천사를 쓴 김개미 시인의 말처럼

'이 책은 이별했기 때문에 태어난 책이 아니라, 사랑했기 때문에 태어난 책'이 분명하다.

그러니 순간순간 더 많이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했을 거다.


죽음 전까지 살아 있던 건 청력이다. 그이가 스러져갈 즈음 시어머님이 아들을 흔들어 깨웠다.
"얼른 나아서 집에 가자. 하율이랑 같이 놀이동산 가야지." 시어머님은 젊은 엄마가, 남편은 아이가 되어 있었다. 시어머님이 물으셨다. "현수야, 여기가 어디야?" "감옥." 그를 감옥에서 꺼내 주고 싶었다.
"사랑해. 이젠 아프지 않을 거야. 아프지 않을 거야" 내 입에서 기도 같은 말들이 흘러나왔다.
남편 동생이 집에 있던 하율이를 병원으로 데려왔다. 비명을 지르는 아빠를 보고 놀란 아이는 내 뒤로 숨었다.
"하율아, 아빠한테 인사하자. 아빠 볼에 뽀뽀해드려. 아빠는 이제 가실 거야." 아이 어깨를 감싸 안아 남편 쪽으로 이끌었다. "아빠......" 아이가 아빠 볼에 뽀뽀를 했다. 그이는 비명을 멈췄다. "하율아......" 미소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은 게 그의 마지막 손길이었다.
장례식을 치르고 그 장면이 머릿속에 여러 번 떠올랐다.
그이는 고통 속에서 숨을 멈췄지만 고통만 있었던 건 아니라고 믿고 싶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아이의 목소리에 미소 지었다. 빛이 있었다고 믿고 싶다.
- <어둠 속의 빛> 중에서, p19



고백하자면,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를 감옥에서 꺼내 주고 싶었던 저자의 마음,

아빠의 볼에 뽀뽀하는 어린 하율이의 모습,

힘든 중에 아이의 목소리에 온 힘을 다해 미소를 지었던 남편의 모습까지,

상상하지 않으려고 해도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었다.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그 시간, 그 공간들이 오래 머릿속에 머물렀다.


아이는,

그 시간을 기억할 수 있을까.

자신이 자라는 동안 자신의 자라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봐 주지는 못하지만

마지막까지 자신을 위해 온 힘을 냈던 아빠의 모습을.


하율이가 그 모습을 마음속에 오래 기억하며, 간직하며 따뜻함으로 그 순간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지나간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거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사라지고 있다.
어떤 장면은 기억에 남고 어떤 장면은 사라질까? 반복되는 일상은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기억에 남는 순간은 다른 장소, 특별한 사람, 마음 깊은 대화를 나눌 때 만들어진다.
똑같은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는다. 몇 년의 시간이 스르르 가버린다. 한순간을 기억에 남기고 싶다면, 그만큼 특별한 장면을 만들어야 한다. 허무하게 사라지는 시간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은 그뿐이다. 잡고 싶은 특별한 순간은 나 혼자일 때가 아니라 우리일 때다.
- <마지막 여행> 중에서, p37



결국,

나는 지금 이 순간을 특별하게 남겨야 한다는 숙제 하나를 마음에 품게 되었다.

누군가가 온몸으로 깨달은 중요한 사실을 나는 너무 쉽게 얻어 낸 것 같아 못내 미안해졌다.


저자의 어머니가 저자에게 하셨다는

"우선 너 일부터 하고, 나머지는 그다음에 해." 그 말이

시어머니가 저자에게 하셨다는

"너무 고민하지 말아라. 살다 보면 다 길이 생긴다."라는 말이

마음에 남아 있다.


그건, 저자에게 분 아니라

어떤 이유로든 힘든 삶을 건너가는,

문 뒤에서 눈물 흘리고 있을 우리에게 건네는 어른 들의 지혜가, 마음이 담긴 진심의 말처럼 느껴진다.


지금 저자가 선택하고, 걸어가고 있는 길이

'자신'을 먼저 챙기는 길이기를.


익명의 독자가 당신의 글을 읽고,

오래 눈물을 흘렸고,

그 흘린 눈물만큼 감사했다고 전하고 싶다.


15620564.jpg?type=m3&amp;udate=20191018

<<문 뒤에서 울고 있는 나에게>> / 저자 김미희 / 출판 글항아리 / 발매 2019.10.25.




덧붙임


1. 하율이는 커서 '아프지 않은 아빠'가 되고 싶다고 했다. 아이의 바람이 꼭 이루어질 거라고, 많은 어른들이 말해주면 참 좋겠다.


2. 저자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몰랐는데 저자가 그림을 그린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두 권의 책을 나는 다 읽었었다. 이렇게 누군가와 연결된다는 게 괜히 신기해졌다. 그리고 그녀의 다음 그림이 너무 궁금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의 살던 골목에는, 여전히 그들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