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유 같은 건 늘 나중에 붙는 법

- 황인찬 <<사랑을 위한 되풀이>>를 읽는 밤

by 목요일그녀

정시에 출근을 하던 날엔 목요일 아침마다 라디오에서 황인찬 시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박은영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FM 대행진 속 한 코너 '인찬광역시'를 통해서였다.

시인은 매주 자신이 고른 시를 가져와 자신의 목소리로 낭독했다.


시를 낭독하고 청취자들은 시에 대한 감상을 보낸다. 그러면 시인이 다시 그 사연을 소개하는 짧은 코너.

운전을 하며 듣는지라 한 번도 문자를 보내지는 못했지만, 그 짧은 시간 한 편의 시를 듣는 그 순간이 참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의 시는,

시인의 목소리를 닮았다(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중저음의 목소리. 차분하게 속삭이는 다정함.

언제든 급하게 서두르지 않을 것 같은 말의 속도.

중간중간 들리는 듯한 옅은 바람 같은 숨소리.


2017년 즈음 읽었던 『나는 매번 시 쓰기가 재미있다』라는 책 속에서 시인을 처음 만났다.


그 책은, 12명의 젊은 작가를 선정하고, 그들에게 독자들이 궁금해할 만한 같은 질문을 던졌다. 책 속의 이야기는 12명의 작가들이 답한 질문들의 대답이자, 그들의 고백이다.


그 글에서 시인은 말했다.


『한 편의 시를 다 쓰고 나니 어쩐지 시를 계속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시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시가 무엇인지 전혀 몰라야 한다는 것이었고, 시를 계속 써 나가기 위해서는 시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인으로서 살아가는 지금은 시를 벗어나는 시, 시가 아닌 시, 시를 의심하는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잘 되지는 않지만.』 시를 벗어나는 시, 시가 아닌 시, 시를 의심하는 시, 황인찬 중에서


그 이후 시인의 시를 찾아 읽었고, 시인의 시를 좋아하게 되었다.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다.

"그저 황인찬의 시라서 참 좋다고"


이번 시집의 제목을 두고 시인은 말했다.

"이 시집은 1959년 11월 30일에 발간된 전봉건의 첫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에서 제목을 빌렸다. 꼬박 60년의 시차를 두고 있는 셈이지만, 특별히 의식하고 정한 것은 아니다. 전봉건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인데 어째서 그를 사랑하느냐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이유 같은 것은 언제나 나중에 붙는 것이다. - 시인의 말 중에서-"


'이유 같은 것은 언제나 나중에 붙는 것' 그 말이 좋아 또 시인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시인이 의도한, 시인이 말하는 세계 혹은 관념, 큰 의미 같은 것들에 대해 정확히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아쉽고, 그래서 나의 무지함이 안타깝지만, 결국 다시 시인의 시로 돌아와 생각한다.

나는 시인이 말하는 '삶'이 좋다.

나는 시인이 말하는 '일상'의 이야기가 좋다.

나는 시인이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들이 좋다고.


그러니, 좋아하는 이유 같은 거라 아무려면 어떠냐 싶다.



식탁 위의 연설

왕십리는 미아리가 되고 차창에 들어오는 빛이 옥스퍼드
셔츠가 되고 유모차는 다리 저는 개가 되고

잠들어 기댄 어깨가 어두운 종점이 되고
늙은 나무는 고향집의 은유가 되는

그것이 삶이라니

돌아오는 길은 모르는 동네다 공원을 걷는 사람은 호수의
조명이고

매일 밤 거실 바닥에 누워 생각한 것은
잠들면 모두 까먹게 된다

너무 이상해

문을 열고 나가면 아는 것들만이 펼쳐져 있는데, 문을 열
고 나가면 모르는 일들뿐이라니

그것은 네가 어느 저녁 의자 위에 올라서서 외친 말이다
나는 네가 의자에서 떨어지면 어쩌나

그것만 걱정했고

그런 것이 우리의 일상이었고,
이제는 일상 말고는 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 <식탁 위의 연설> 전문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웃고 있는 서로를 보며 우리가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무
엇을 보고 또 알았는지 끝없이 이어진 수평선을 보며 우리
가 서로에게 어떤 마음을 주고받았는지

"이런 삶은 나도 처음이야"

그렇게 말하니 새하얀 입김이 공중으로 흩어졌고

그때 우리는 사람으로 가득한 여름의 도시를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의 젖은 발이 뜨거운 지면에 남긴 발자국이 금세 사
라져버리는 것도 모르는 채로

- <사랑과 자비> 부분, p58


그날 밤에는 늦도록 잠들지 않았다

즐거웠던 지난 일들에 대해 한참 이야기 했다

폭죽 불꽃이 터져오르는 해변에서 불을 피우며 여럿이 어
울려 춤을 추었던 그 밤과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태풍
이 찾아와 살풍경한 해변을 웃으며 걸었던 일 따위에 대해
아주 짧았고 그래서 충실했던 날들에 대해

손을 잡은 채로,
손에 매달린 아름다운 것을 서로 모르는 척하며

그렇게 그 장면은 끝난다

이제 이 시에는 바다를 떠올린다거나, 바다에서 있었던
일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과 그 생활 따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이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여름과 그 바다가 완전히 끝나버렸는데도 아무것도 끝
난 것이 없었다는 것에 대한 것이고
영원히 반복되는 비슷한 주말의 이미지들에 대한 것이고
내 옆에 누워 조용히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느끼는 소박한 기쁨과 부끄러움에 대한 것뿐

그렇게 삶이 계속 되었다

- <이것이 나의 최악, 그것이 나의 최선> 부분, p75



그런 삶,

때로 아무것도 아닌 삶,

오늘과 내일의 삶,

어제와 그저께의 삶,

그 삶을 이어가는 일상,

일상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당신들이 있는 도시, 적막한 시골, 어두운 밤, 밝은 낮.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천천히 떠올리면서, 느끼면서

시인의 시를 마음에 담았다.


그냥 그랬다.

이유는 늘 나중에야 오는 법이니까.



15871629.jpg?type=m3&amp;udate=20191224

<<사랑을 위한 되풀이>> / 저자 황인찬 / 출판 창비 / 발매 2019.11.30.




덧붙임



1. 이번 시집 속 시의 제목이 참 좋았다. 제목으로만 '시'를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중에서 '그것은 가벼운 절망이다 지루함의 하느님이다'라는 시는 제목도 시도 참 좋아서 여러 번 되풀이해 읽었다.

이 시의 전문을 꼭 소개하고 싶지만, 그건 궁금해질 당신들의 선택에 맡기기로 한다.


2. 내가 처음 좋아하게 된 시인의 시는 『구관조 씻기기』라는 시집 속에 수록된 <무화과 숲>이라는 시였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로 끝나는 시.

https://poohcey.blog.me/220877426524



3. 이건 사족.

우연히 시인을 만난 적이 있다. 나는 시인을 알고 있었지만 시인은 나를 알리 없으므로 나는 먼저 아는 척을 했다.

"라디오 너무 잘 듣고 있어요."

"아, 정말요? 듣는다는 사람 처음 봐요. 감사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라디오 속의 그 목소리와 같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다양한 삶의 방식을 생각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