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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그녀 Jan 02. 2020

02. 당신의 '완성'을 잊지 않겠습니다.

- 추모 

                                                                                                                                                 

12월 30일 종무식이 끝나고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웃으며 인사했다. 

"새해에 만나요~" 하는 인사도 덧붙였을 것이다. 


그렇게 헤어진 지 48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녀의 부고(訃告)를 접했다. 


처음엔 단체 카톡 방에 올려진 그 이름이 잘못 적힌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의 할머니이거나 할아버지를 잘 못 적은 것이려니 했다. 

이제 막 서른을 넘긴 그녀의 이름은 그렇게 적히기엔 알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실수를 하다니 담당 직원의 꼼꼼하지 못함을 흉보면서 나는 나의 새해를 맞이했다. 


아홉 살이 되는 큰 아이와, 이제 3살이 되는 둘째 아이를 축하해줘야 했고, 

새로 이사 간 엄마 집에도 가야 했고, 

나의 새해 계획을 가족들과 나눠야 했다. 


연이어 울리는 카톡 알림음을 들으며 무언가 잘못됐구나 알게 되었다. 


헤어짐을 미리 짐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겸손할 수 있을까

조금 더 다정할 수 있을까. 


나는 늘 그녀를 귀찮게 하는 동료였다. 

'우리 좀 친하니까~'라는 모종의 암호를 품은 사람처럼 

종종 그녀에게 새로 도서관에 입고된 책은 없는지, 

며칠 연체된 도서 반납 일자를 늦춰 줄 수 없는지, 

신간 도서를 신청했는데 빨리 구입해 줄 수 없는지 물었다. 


그때마다 

늘 친절한 목소리로, 

"네네, 알겠어요. "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해드릴게요~" 같은 답변을 건넸던 건 언제나 그녀였다. 


어쩌자고 무턱대고 덥석덥석 받기만 했을까. 

"밥 한 번 꼭 살게!" 그 약속을 한 번도 지키지 못했을까. 


왜 후회는 늘 이렇게 눈치도 없이 늦게만 찾아오는 것일까. 


사람의 일생에 주어진 그 많고 많은 시간 중에 '지금'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삶은 딱 지금의 시간까지였다는 것이므로 어느 때 맞게 되는 죽음이라도 죽음은 그 자체만으로 삶이 다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완성이 되었다는 것은 아쉬울 수 있을지언정 오랜 시간 슬프지는 않아야 한다.
-  전수영, 『나의 차례가 왔습니다』 <완성된 삶> p293


전수영의 『이제 나의 차례가 왔습니다』라는 책을 읽으면서, 아버지를 잃은 저자의 글에 마음이 먹먹해지는 순간에도 아주 잠깐 이런 생각을 했다. 


노년의 삶이란, 

그래, '지금'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 


이 생각은 틀렸다.

누군가의 ' 지금' 죽음 앞에 자연스러움은 어울리지 않는 말이구나. 


누군가 새해가 되었다고 힘차게 새 희망을 품는 그 시간에, 

누군가는 그 새해를 맞이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걸 

누군가의 희망이 누군가에겐 영영 갖지 못할 희망일 수도 있다는 걸 이제야 배운다. 


"엄마, 왕 할머니는 어디로 가시는 거야 이제?"

재작년 추석 즈음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를, 몇 번 만나보지도 못한 증조할머니를 예윤이는 종종 떠올렸다. 

아이가 접한  최초의 죽음이었다. 

죽음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정확히 인지하게 된 아이는 그 이후로 쉽게 '죽는다'라는 말을 혹은 '죽었어'라는 말을 내뱉지 않는다. 


죽음은 두렵다. 죽음을 모른 척하고 싶은 이유는 이 세상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 쉬 이 세상을 떠나기엔 아쉽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빠가 떠난 후에도 나는 웃는 날이 참 많고,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도 먹고, 또 멋진 장관에 눈이 휘둥그레져 황홀해지기도 한다. 내가 난리를 치고 법석을 떨어도 시간은 참 반듯하고 정직하게 흘러간다. 잔인하게 슬픔도 계속 오고, 친절하게 행복함도 계속 온다. 그냥 인생은 그런 건가 보다. , p179
- 전수영, 『나의 차례가 왔습니다』 <잔인하고 친절한> 전문, p179


죽음 자체도 두렵지만, '죽음'이라는 말 자체가 더 두렵다는 걸 아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아이의 입을 통해 그 단어가 발음될 때, 혹시나 모를 그 두려움이 성큼 앞으로 다가올까 봐 잔뜩 몸에 힘을 주게 되었다. 

남겨질 이들에게는 절대 잊히지 않을, 잊힐 수 없는 게 '죽음'이라는 것. 


그녀의 삶이 지금 '완성' 되었다는 게 아직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그녀의 다정한 웃음이 자꾸 떠올라서 

끝내 못 사준 밥 한 끼가 못내 미안해서 


아직은 안녕, 이라는 말을 전하지 못하고 있다.                                               

                                                            [Image by Goran Horvat from Pixabay]


                                                                                                                                                    

그래도, 

이것만큼은  꼭 지키겠다고 그녀의 사진 앞에서 조용히 약속했다. 


당신의 '완성'을 잊지 않겠습니다. 

환한 웃음과, 그 웃음 덕분에 고마웠던 그 마음도 함께 간직하겠습니다. 



2020.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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