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 1(잘 가요, 보경엄마)
잠결이었다.
핸드폰에서 소리가 났다. 어렴풋이 무슨 소리지? 막연히 생각하며 탁자에 놓인 핸드폰을 집으려 팔을 뻗었다.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그 사이 벨 소리가 끊겼다. 이 밤중에 누구지? 간신히 찾아서 핸드폰을 켜니 새벽 세시가 좀 지났다. 카톡 보이스톡으로 온 꽃집아줌마의 전화였다.
꽃사진이나 가족사진을 카톡에 자주 올리셨던 꽃집아줌마의 전화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내가 지금 미국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시니 이 시간에 전화를 거셨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이내 다시 잠이 들었다.
이번 여행에서 호텔에서의 생활은 단 이틀이다. 새로운 환경에 아이들은 약간 흥분되어 있었다. 잠에서 깨자 우리 방으로 몰려와 침대를 점령했다. 갑자기 방 안은 작은 전쟁터가 되었다. 이 침대에서 지침대로 겅중겅중 뛰어다니고, 물건을 이것저것 만져서 TV 핸드폰 영상을 틀어주고야 조금 잠잠해졌다. 호텔 숙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아침 조식을 즐기는 것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1층으로 내려갔다. 식당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다시 카톡 보이스톡으로 벨이 울렸다.
꽃집아줌마였다. 순간 어젯밤 전화벨 소리가 생각났다. 전화를 받자 꽃집아줌마가 다짜고짜 하신 말씀은 "보경 엄마가 죽었어."였다. 통화가 끊어질까 급하게 용건만 이야기하신 것 같았다.
너무나도 뜻밖의 소식이었다. 잠시 너무나 혼란스러워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장례식장은 어디고 몇 시에 모이기로 했다는 꽃집 아줌마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무슨 말인가 해야 했는데 나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통화가 끊겼다. 뭔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손을 잡은 손녀들은 신이 나서 조잘거렸다. 지난해 와본 적이 있다고 한다. 이 호텔 식당에는 빵이 어디에 있고 요구르트는 어떤 종류가 있는지 계란은 삶은 계란을 먹을 것인지 스크램블을 먹을 것인지 커피를 마시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나는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 먹는 둥 마는 둥 멍한 상태에서 식사를 마쳤다.
아이들을 저들의 방으로 보내고 나는 내 방으로 들어왔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 선생님에게 전화했다. 전화가 너무 안돼 외국 여행 중일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꽃집아줌마와 보이스톡으로 연결이 돼서 다행이라고 했다. 보경엄마가 어떤 병이었는지 얼마나 아팠는지는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고도 했다. 모두들 황망한 것은 마찬가지인 거 같았다. 나는 부조를 부탁하고 전화를 끊었다.
우리는 옛날 서울 농대가 있었던 서둔동의 오래된 동네 친구들이다. 개발의 바람을 비껴간 그 동네는 농대 캠퍼스가 보존되어 나무가 울창하고 꽃이 많다. 우리 모임 인원은 다섯 명이다. 모두 꽃을 좋아해 모임 이름을 앵초회라 지었다. 보경엄마는 동네 미술학원 선생님이다. 그 동네 아이들은 자라면서 거의 그 미술학원을 다녔다. 보경엄마는 동네 모든 아이들의 선생님인 동시에 아이들 엄마의 선생님이기도 했다. 보경엄마는 회원 중 가장 나이가 적었지만 마음이 넓고 그릇이 큰 사람이다. 그림을 좋아했고 아이들을 사랑했고 항상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귀 기울였다. 무엇보다 꽃을 좋아했다.
앵초회 회원들은 모두 꽃을 좋아했다. 온 세상이 꽃밭이 되기를 바라는 꽃집아줌마, 꽃은 물론 인테리어에 타고난 재주를 갖고 있는 설연엄마, 털털하고 호탕한 우 선생님 그리고 내가 앵초회 회원이다. 옛 서울농대는 우리의 놀이터다.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귀한 고목들이 빽빽하고 그 나무들은 해마다 꽃을 피워야 하는 자신들의 의무를 거르지 않았다. 언제 가더라도 꽃과 나무들은 저마다 자신의 소리를 냈다. 그 동네는 항상 볼 것이 많고 이야기할 것도 많았다.
보경이네 2층 미술원은 우리의 또 다른 놀이터였다. 이젤과 각종 조상 크레파스 물감... 오래된 미술도구가 빼곡했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몇 년 전 그린 아이들의 그림도 볼 수 있다. 미술원은 시간이 비껴간 곳이었다. 그곳은 편안하고 따뜻했다. 자장면 한 그릇으로도 우리는 행복했다.
보경엄마가 없다니....
보경엄마와 함께이던 우리의 공간이었는데...
보경엄마와 함께 우리의 장소는 사라지고 추억만 남았다.
나에게는 누구보다 미술선생님이 특별했던 이유가 있다. 가장 힘든 시절을 그녀는 나와 함께 해 주었다. 사춘기 자식들, 히스테릭한 시어머니, 내 편이 될 수 없는 남편... 총체적인 난국 속에 하루하루 버티던 그 시절, 시집살이의 종지부를 찍은 그날, 그녀가 옆에 있었다.
나는 뱃속에서 뭔가 끄집어낼 듯 꺽꺽거리며 울부짖었다.. 7년간의 시집살이가 억울해서 그랬는지, 자식들과 살아야 할 앞날이 걱정되어서 그랬는지, 사람에 대한 배신감에 그랬는지... 그 울음의 의미는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날 나는 내 삶의 바닥을 보았다. 그곳은 미술원 아래층 보경이네 부엌이었다.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었고 보여서도 안될 최소한의 자존심이었는데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25년, 남편과 나는 지금 딸과 사위 세명의 손녀와 미국 동부 여행을 하고 있다. 나에게도 이런 시절이 올 것이라는 것은 나 자신도 알지 못했다. 나는 보경엄마에게 고마웠다는 말을 했어야 했다. 내가 정말 어려웠던 그 시절 함께 해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우리 앵초회가 모여 보경엄마가 있는 납골묘에 갔다. 산을 오르며 이리저리 그녀가 있는 자리를 찾았다. 삶이 복잡하고 어려운 것에 비해 죽음은 심플하고 객관적이다. 화려한 꽃다발 대신 꽃집아줌마가 꺾어온 야생화로 마음을 담아 그녀를 보냈다.
그 동네를 떠났지만 우리가 함께였던 추억을 잊을 수가 없다.
다시 봄이 왔다.
우리의 놀이터 서둔동에는 올해도 수많은 나무들이 각가지 꽃들을 피워낼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평안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도 계속될 것이다.
잘 가요, 보경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