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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솜 Apr 27. 2024

백제인이 쌓은 城

규슈의 백제성, 水城


 다자이후 텐만궁


지하철을 갈아타고 텐센 역에서 다자이후 덴만궁까지 갈 수 있었다. 다자이후 텐만궁역에서 조금 걸어가니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가 나왔다. 진정 일본의 관광지에 왔다는 느낌이었다. 호텔에서 아침 먹고 바로 나왔는데 이미 사람들로 거리는 인산인해였다. 텐만궁을 보러 올라가는 길뿐 아니라 이미 궁을 보고 내려오는 사람들로 뒤엉켜 있었다. 그 와중에 남편은 옛날 회사 다닐 대 동료를 만났다. 아침 일찍 벳부에서 출발해 구경을 다 하고 나오는 길이라고 한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아는 사람을 만나다니....  잠시 인사만 하고 돌아섰지만 기념사진 한 장 찍어둘걸 그랬다는 생각을 했다.   


   

텐만궁은 다자이후시에 위치한다. 다자이후는 7세기 이후 중앙정부에서 떨어져 있는 규슈 지역을 다스리는 총독부가 있던 곳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역사유산은 거의 다 여기에 모여 있다. 그중 텐만궁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라는 사람을 신으로 모신 신사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해박한 학식과 뛰어난 문장을 발휘하여 상찬을 받았으며, 산업을 일으키고 교육을 장려하였으며 천왕의 신임을 얻어 우대신까지 올랐다. 그러나 실권하고 이곳에서 사실상 유배생활하면서 아들이 죽는 아픔을 겪고 자신도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그의 유해 묻힌 자리에 신전을 세웠으며 지금은 학문의 신, 성심의 신, 글씨의 신으로 추앙받고 전국 텐만궁의 총본산으로 자리하고 있다.      


텐만궁은 건물의 역사성과 함께 나무와 수림이 아름다웠다. 규슈는 우리나라 제주도와 비슷한 기후이므로 식생에 있어 상록활엽 교목이 많다. 요즘 잘 가꾸어 논 지역이 많지만 오래된 역사문화지역은 오래된 나무 때문에 경관이 아름답다. 몇몇 나무의 연륜이 주는 풍광이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여기에 텐만궁의 본전은 모모야마시대에 세워진 아주 위엄 있는 건물이었다. 지금은 겨울이라 가지만 남았지만 궁 앞의 좌우로 있는 백매는 비매(飛梅)로 유명하다고 한다. 궁 뒤쪽의 수백 그루의 노매는 여러 품종이 어우러져 일본 굴지의 매화명소라고 한다.      


 



水城 


수성은 관광명소라 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 사람과 관련이 있는 역사적인 장소다. 백제인이 쌓은 토성이다. 텐만궁에서 몇 킬로 떨어져 있어 일본 사람들이 굳이 찾는 장소가 아니다. 나는 텐만궁을 잠시 보고 수성으로 향했다. 현지인에게 가는 길을 물었지만 누구도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다. 


터덕터덕 걸었다. 덕분에 시 외곽의 모습을 천천히 볼 수 있었다. 높은 언덕 위로 고등학교가 보인다. 언덕을 걸어 올라가려면 학생들이 등교하기 힘들 거 같았다. 우리나라처럼 어느 대학에 몇 명 보냈다는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주택단지도 보였다. 넓은 평야를 바라보며 위치한 주택단지도 보였다. 우리가 걷는 길은 넓은 평야다. 


수성은 후쿠오카만에서 다자이후시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다. 백제가 망하고 몇 년 동안 백제복원 운동이 있었다. 백제복원운동에서 끝까지 저항하던 백제 유민들은 그들을 도와주었던 일본군과 이곳으로 퇴각했다. 당시 신라가 당을 등에 업고 한강 유역을 점령하자 백제 유민들은 일본에 도움을 요청했다. 신라와 당, 백제와 일본이 편이 되어 금강 유역에서 큰 전투를 벌였는데 이 전투가 백청강 전투다. 이 전투에서 백제유민과 일본이 져서 이곳으로 퇴각했는데 그들은 당과 신라가 이곳까지 올까 봐 이 성을 쌓았다고 한다. 성의 모양은 전형적이 백제성으로 토성이다. 마치 몽촌토성을 보는 것과 같았다.      


성의 길이는 1.2km에 달한다. 중간에 도로가 생겨서 끊어진 것을 제외하면 거의 잘 보존되어 있었다. 성에는 수성을 알리는 커다란 표석과 전시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전시관에서는 수성을 알리는 각종 자료가 비치되어 있었고 수성에 대해 시청각 자료를 관람할 수 있었다. 7세기 조성된 수성은 이후 이 도시의 관문으로 이용되었다. 영상에서는 이곳을 부임했던 한 지방관이 돌아갈 때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간다는 사랑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전시관 안에서 설명해 주는 노인은 역시 친절하고 최선을 다해 보였다.  그러나 이 성이 백제성이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팸플릿 한편에 자그마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어느 전쟁에서나 이긴 사람이 있고 진 사람이 있다. 대부분 역사는 이긴 사람 위주로 전해지고 있다. 전쟁에서 진 사람들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진 사람들 중 일반 백성은 정권이 바뀌어도 그곳에서 살아남는다. 그러나 지배했던 상류계층 사람들은 다른 지배계층과 함께 현지에서 살아가기는 어렵다. 


백제의 유민은 대부분 백제의 상류계층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이곳에서 현지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고급문화를 경험한 이들은 이곳에서 현지인들에게 문화를 전해주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은 국가의 형태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후 일본은 율령을 반포하고 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일본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분명 우리나라에서 같 백제 유민의 공이 있었을 것이다. 그 흔적을 찾는 것이 이번 여행의 의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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