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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앙마 Jul 12. 2023

사람이 먼저다

어느 4월의 자살 산책(최하늘, 행복우물, 2023)

<사람이 먼저 있었고 '살다'라는 말이 생겼다>


1984년 6월 4일 중앙일보에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서정범 교수의 주장이 실린 적 있다. '살다'의 어간에 '암'이라는 접미사가 붙어 '사람'이라는 전성명사가 된 것이라는 기존의 학설에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몽고어, 만주어, 일본어 등의 어원과의 오랜 비교를 통해 얻어낸 결론이었다.


그렇다. 사람이 먼저다. 심지어 '살다'라는 말 앞에서도 사람은, 먼저다. 왜 갑자기 어원 추적이냐고? '자살'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이 명제가 꼭 필요했다.(아직은 그만큼 내게 용기가 부족하다는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누군가는 간절하게 삶을 원하듯이, 또 다른 누군가는 간절하게 죽음을 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올바른 답이 아닐까?" - '나에게는 삶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p.59


꽤 오랜 시간 자살을 준비했던 사람이 있었다.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말리기도 해 보고 꾸짖어도 보고 귀 기울이며 공감도 해봤지만 결국 그 사람이 그 목적을 진짜로 달성했을 때 느낀 원망, 자책, 슬픔, 무력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아무리 오랜 시간 '아, 언젠가는 정말 자살할지도 모른다'고 마음의 준비를 했던들 그 깊이가 얕아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도 확신한다.


하지만 자살에 대한 근본적인 내 몰이해를 어느 정도 걷어내는 씨앗은 분명 그 사람이 심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가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동등한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으니까. 다만 여전히 '자유', '존엄'과 같은 숭고한 가치와 철학을 내세워도 쉽사리 수용되기 어려운 금기와 억제의 대상이라는 점 또한 깊이 알기에 스스로 언급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나아간 친구와 산책하듯 그 주제를 용기 있게 끄집어낸 저자의 도전에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죽음을 존중'하며, '죽음과 자살을 선정적으로 다루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그럼에도 나는 존중을 이야기한다', p.195) 노력에도 마음으로부터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여전히 죽음을 논하고 자살을 하나의 권리로 존중해야 한다는 마음속 믿음을 바깥으로 꺼내는 것이 내게는 어렵다. 그래서였을까. 집에서도 가족들이 없는 시간을 선택해 최대한 혼자 읽고 오고 가는 출퇴근길에서도 당당하게 꺼내 읽지 못했다. 물론 두렵다기보다는 '귀찮아서'다. 무슨 일 있냐는, '나쁜' 생각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 공세에 일일이 답할 만큼 내 고민에는 의무감이 존재하거나 실제로 실행에 옮겨나갈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진 않으니까.


내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고 해서 생명을 경시한다거나 인간의 존엄을 무시한다고 비판받는 것 역시 사양하고 싶다. 더 진지하게 살기 위하여 죽음 역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방식에 관한 논의에도 폭을 넓히고 싶을 뿐이다.


앞서 언급한 어원 주장에서 서 교수는 이 주장과 함께 '사람'과 '사랑' 역시 같은 어원임을 주장했다. 즉 '사람'이 '삳', '살', '사 '의 과정을 거친 것처럼 '사랑' 역시 '삳'으로부터 '살암', '사랑'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삶과 사랑이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는 것은 과연 우연일까. 하지만 사랑을 스스로 끝낸다고 해서 손가락질을 받지는 않는다. 둘 다 치열하게 경험하고 아름답게, 자유롭게 끝낼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삶과 죽음 사이 운명에 갇힌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몸짓은 아닐지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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