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민주당은 무너지는가(조기숙, 테라코타, 2023)
민주당은 염치와 상식을 잃어버렸다. (p.10)
‘민주당’이라는 단어를 ‘한국 정치’로 바꿔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염치와 상식이 사라진 정치에는 그럼 무엇이 남을까. 격렬한 적대와 똘똘 뭉친 집단적 아집 정도가 아닐까.
2022년 대선 이후 한국 정치 전반에는 격렬한 대립과 ‘너나 나나 다 똑같이 더럽지!’라는 흙탕물만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이러한 양상이 민주당에 더 치명적인 이유는 민주당의 큰 기둥이 바로 ‘공정’과 ‘상식’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뽑는 선거라는 프레임이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그것이 과연 유권자들 탓일까.
어쨌든 민주당을 지지했던 상당수의 유권자들은 선거에 나서지 않았다. 아니, 더 나아가 스윙보터의 역할을 했다. 투표를 하지 않는 소극적 역할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혼쭐을 냈다. 단순히 이전 정부의 과오를 ‘심판’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대통령의 지지율은 마지막 날까지도 역대급으로 높았기 때문이다. 권력을 이어가기에, 더 나은 미래 비전을 보여주기에 민주당은 부족했다.
정치는 결과로 말해야 한다.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니다. 정상 참작은 되지만 실패한 결과에 선한 의도로 이유로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p.196)
결국 2022년 대선은 민주당의 패배로 끝났다. 박빙의 패배라고는 하지만 결국 정치는 결과로 말하는 영역이다. 현직 대통령의 말년 지지율로는 최고 수준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통령을 만들어냈던 민주당은 정치 신인에게 대권을 넘겨줬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졌잘싸'라는 위로는 다수 국민들로부터 여전히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대통령을 보유한 180석 거대 정당이 내뱉기엔 너무도 안이하고 염치없는 행동이었다.(나 역시 그리 생각하려고 노력했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는 이어진 지방선거 또한 민주당을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21세기 선진국 시민에겐 내 편 네 편이 없다. 공정과 상식만이 내 편일 뿐이다. 이쪽이 집권하면서 잘못하면 저쪽에 기회를 주는 게 공정이고 상식일 수 있다. 1980년대의 틀로 청년을 재단하지 말고 그들의 틀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게 우리의 업보 아닐까. (p.207)
민주당의 상식과 염치의 수준은 어느 순간 정체되었다. 민주당의 근간이었던 김대중과 노무현 시기 민주당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폭넓은 스펙트럼을 논의하는 게 가능했고 빠르게 흡수할 수도 있었다. IMF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상황에서도 민주주의는 발전했고 경제는 빠르게 수습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0년 동안 정권을 내어줬지만 국민들의 촛불이 만든 '탄핵'이라는 거대한 역사는 극적으로 민주당에게 새로운 기회를 안겨 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국민들이 준 기회는 이제 오래된 것이 되어 버린 과거의 비전과 정체로부터 벗어나 '제발 쫌!'이라는 새로운 혁신을 갈망했던 명령이었다.
하지만 민주당은 그 기회를 놓쳤다. 과거의 눈으로 현재를 분석하고 과거의 도구로 미래를 재단하려 한 결과, 혁신은 늦어버린 시점에, 엉뚱한 방법으로, 고집스럽게 파고들었다. 국민들의 간절한 목소리는 담아내지 못했고 똑같이 반칙해도 된다는 착각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다. 여전히 '우리가 옳다'라고 외치는 모습은 국민들의 차가운 외면을 불러왔다.
민주당은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p.147)
그렇게 정권은 바뀌었다. 하지만 여전히 민주당은 집권 여당처럼 행동한다. 비전을 제시하지도 못하고 혁신 동력은 더더욱 멀어졌다. 온갖 카르텔의 주범 또는 공범으로 지목되면서도 함께 진흙탕 속으로 빠져들 뿐, 미래 비전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또 선거는 다가와 버렸다.
의외로 국민은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걸 원한다. 이기고 싶은 정치인이라면 정치 현실보다 훨씬 이상적인 기준을 세우고 지켜야 한다. (p.348) 2024년 총선의 시대정신은 분열이 아니라 '연대', 적대가 아니라 '공존', 흑백논리가 아니라 '합리적 이성'이다. (p.364)
근본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상식과 염치를 다시 세워야 한다. 선거가 코앞이니 일단 힘부터 합치자는 인식은 안이함을 넘어 위험하다. 그 중심이 오직 민주당이어야 한다는 만용 또한 버려야 한다. 지난 대선과 지선에서 차라리 투표를 포기할망정 스윙보터로까지는 나서지 않았던 사람들마저 잃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정권 견제론이 우세한 상황에서도 민주당이 지지도를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물론 저자의 모든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한국 정치 자체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과 낮은 기대치를 반드시 극복해 내야 한다는 절박함에는 동의한다. 민주당의 몰락은 결국 한국 정치 전반의 퇴보와도 연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진짜' 기득권을 내려놓고 '진짜' 혁신에 동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누구라도 연대하고 공존하며 합리적 이성을 발휘해야 한다.
선거에서 이기고 지는 것을 걱정하기에 앞서 민주당은, 한국 정치는 앞으로 한 발 내딛는 것에 더 집중해야 한다. 상식과 염치, 혁신과 포용으로 나아가는 정치 세력에게 국민들은 자연히 기회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남은 반년의 시간.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과감한 결단이, 진정성 있는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