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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앙마 Sep 08. 2023

아! 비를 그을 수 있다니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단편집(아쿠타카와 류노스케, 하다, 2019)

총기가 흐르는 눈빛. 자신감이 엿보이는 날렵한 턱선과 눈썹. 어딘지 모르게 백석을 떠올리게 한다.


책표지의 그와 같은 사람인지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어느 날 해 질 무렵의 일이다. 사내 하나가 라쇼몬 아래에서 비를 긋고 있었다.(라쇼몬, p.10)


아! 이 한 줄로 모든 게 끝났다. 이 사내는 글을 쓰기 위해 태어난 천재였구나. 비를 긋다니. 움직이는 것은 비뿐인 상상 속에서 한 사내가 눈으로 비를 긋고 있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칼을 뽑은 것도 아니고 팔을 휘두른 것도 아니지만 분명 그 사내는 비를, 세상을 긋고 있었다. 별다른 감정도 없이, 동시에 세상에 쏟아낼 말들을 꾹꾹 눌러가며 비를 긋는 그 사내. 바로 작가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의 모든 소설들이 짧고 강력하다. 아쿠타카와의 소설을 읽으며 '회색인간'의 김동식을 떠올린 것도 무리는 아닐 터. 토막 난 현실이 환상과 사실적 묘사 사이에서 쉼 없이 싸우는 동시에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는 모습이 닮았다. 비를 그어내듯 세상을 난도질하기 딱 좋도록 어지럽게 흩날리는 그의 소설은 김동식의 그것처럼 극적인 동시에 현실을 곱씹어보도록 재촉해 댄다.

 

저는 죽일 때 허리에 찬 칼로 죽이지만 나리님들은 칼을 안 씁지요. 권력으로 죽이고, 돈으로 죽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남을 위하는 척 말로도 죽이지요. 아무리 피를 흘리지 않고 멀쩡히 살아 있어도, 그래도 죽인 겁니다. 죄질을 따지자면 나리님들이 나쁜지 제가 나쁜지 모르죠.(비웃듯 웃는다.)(덤불 속, p.29)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이 빨간 코쟁이 5위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수많은 누군가가 이 자의 표정과 목소리를 빌려 사람들의 무정함을 나무라고 있다.(죽, p.74)


그렇습지요. 겉으로만 요란한 화가는 하나같이 추한 데서 나오는 아름다움 같은 것을 알 리가 없는 법입지요.(지옥도, p.166)


진정으로 추한 것은 따로 있다. 세상이 추하고 사람들의 시선이 추할 뿐이다. 누군가를 깎아내리고 내 행동을 정당화하며 그렇지 못한 타자를 추하다고 손가락질하는 그 세상을 향해 아쿠타카와는 거꾸로 조롱의 손길을 던지고 해학의 춤사위를 그치지 않는다.

 

그것이 독이 된 것일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그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어둠 속으로 숨어 버린다.

 

죄를 깨달았기 때문에 저주도 받는 것이다. 죄를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늘의 벌도 내리지 않는 법이다. (중략) 죄가 죄인 줄 아는 사람에게는 벌이든 속죄든 모두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다.(방황하는 유대인, p.127)


시로는 그저 살고 싶었을 겁니다. 아아, 구로의 울부짖는 소리가 아직도 귀에서 웅웅 거립니다. '캥, 캥. 도와줘! 캥, 캐앵. 살려줘!'(시로, p.221)


긴자 뒷골목은 조용했다.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햇살마저 봄날같이 고요해졌다.(다네코의 우울, p.274)


그는 그저 뿌연 어둠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았다. 이가 빠져 버린 가는 검을 지팡이 삼아.(어느 바보의 일생, p.322)


그는 그저 살고 싶었고 살 수 있다고 믿었다. 허위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제대로 살고 싶다는 의지가 그 역시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의지와는 반대로 현실은 그에게 섞일 여지를 내주지 않았다. 점차 불투명해져 가는 인생 속에서 결국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이 쌩쌩 불어대는 그의 짧은 소설들 속에서 자칫 길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살아내야겠다는 그의 발버둥을 더듬어가며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만큼 그의 작품들은 묘하게 감정을 끌어내려 바닥을 더듬게 만든다. 마치 빠져나갈 수 있으면 빠져나가보라는 듯, 나른한 비웃음이 섞여 있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을 향한 것이었을지도. 살아내 보려는 거친 발버둥이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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