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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앙마 Sep 10. 2023

진지함만 남은 세상, 그건 슬픈 일

진지하면 반칙이다(류근, 해냄출판사, 2022)

그대 부디 살아 있으라. 살아 있으면 언젠가 우리도 반드시 꽃으로 피어 마주 볼 날 있으리. 사람아.('그대 부디 살아 있으라' 중)


존버.

어느 순간부터 버티는 게 일상인 삶이 되어 버렸다. 억울해도 버티고 비굴해도 버티고 부조리해도 버티고 그리워도 버티고 그냥 존x 버티는 것 외에 남은 것이 없어져 버렸다. 그래도 버텨 보자고 서로를 격려하는 것 외에는 딱히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격려라도 하면 다행이지. 시인에게 미안하다. 사회가 해야 할 일까지 떠맡겨 버렸으니 참으로 미안하다.

 

고맙고 미안하다.

 

증오와 갈등과 혐오와 분노와 탐욕과 폭력과 음모와 천박과 이기와 파렴치의 각축장 한가운데 오늘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불길하게도 일찍 피어난 봄꽃들이 다 질 것이다. 나는 살아남은 나를 가엾어하며 슬퍼하며 또 한잔해야지. 이 술집엔 순 늙고 진 이웃들만 앉아 있다. 순한 초식동물들 같다. 눈물겹다.('지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중)


시인은 혼자 버틸 수 없음을 잘 안다. 지는 법을 배우지 못한 까닭이다. 그래서 더불어 웅크리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 웅크린 무덤 위에 소위 성공했다는 자들이 우뚝 서긴 하겠지만 무덤 속에는 무덤 속 나름의 아늑함이 남아 서로의 삶을 지탱해 준다.

 

또 고맙고 미안하다. 시인에게 너무 많은 짐을 주었다.

 

아는 게 많은 사람보다 느끼는 게 많은 사람이 훨씬 더 이 세계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는 저절로 하느님의 마음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착하게 살아남는 시간' 중)


아는 게 많다는 것을 자랑말자. 느끼지 못하는 게 늘어감을 슬퍼하자.

많이 아팠겠다. 시민의 마음.

 

'사랑해요'라는 말 / 참 오래 견딘 말.('참 오래 견딘 말')


오래 견뎌야 한다는 건 참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만큼 기다리면 보람이 있는 말이, 버틸만한 말이 있다면 바로 이 말이 아닐까.

 

'사랑해요'라는 말. 그래도 견딜만한 가치가 있는 말.

 

나에겐 아직 부르지 못한 노래가 많이 남아 있다.('어떠한 시도 오지 않는 새벽' 중)


기왕이면 같이 불렀으면. 기왕이면 아름다운 노래였으면.

 

먼 데서 오는 구원을 위해 자기 내부의 의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인생은 공허하지 아니한가.('제 힘껏 살아내다' 중)


멀리 있지 않은 것을 멀리서 찾는 이의 마음은 얼마나 애처로운가.

가까운 곳에 있던 것을 이미 멀리 떠나보낸, 그러면서도 그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이의 마음은 얼마나 더더더 안타까운가.

 

후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전자를 포기하지 못해 여전히 뒤를 돌아보고 만다.

 

개에게도 하는 것을 나는 왜 사람에게 하지 못하는가. (중략) 내가 아직 가야 할 사람이 멀었기 때문. 여기서 사람까지가 멀었기 때문이다.('아직 사람에 닿지 못했기 때문' 중)


나아가면 닿을 날이 올 수는 있을까. 적어도 시인은 가 닿을 때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시인에게 또 한 번 미안하다.

 

이제 그만 진지해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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