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의 프란체스코(크리스티앙 보뱅, 마음산책, 2008)
20년 전.
유럽으로 50일의 배낭여행을 떠났다. 여러 목적이 있었지만 아직 영세를 받지 않은 예비자로서 적합한 세례명을 찾는 것 또한 한 가지 이유였다. 그 동기가 나를 막연히 '아시시'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소박한 시골역과 고즈넉한 풍경에 평화롭게 박혀 있는 프란체스코의 마을은 자연과 가난한 이들의 편이었던 성인의 모습과 여러 모로 닮아 있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리고 아시시의 성당과 흔적 속에서 마주한 '프란체스코'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강렬하게 날아와 박혔다. 더 많은 생각을 할 것도 없이 그렇게 프란체스코는 내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부끄럽게도 그 삶을 온전히 따라가고 있지는 못하지만.
감미로운 삶.
그것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권두사)
토비트서 6장 1절의 문장과 함께 시인의 노래가 시작된다. 시인이 노래로서 찬미하고자 하는 이는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가난한 자를 사랑하고 그들 곁에 진심으로 머물렀던 성자다. 동시에 천사와 함께 떠난 아이를 따라간 개가 바로 프란체스코다.
시인은 프란체스코의 어린 시절은 이 한마디로 정의한다. 세속의 삶을 영위했던 프란체스코의 어린 시절은 자유롭고 풍족하게,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큰 부족함이 없었던 시간이다. 훗날의 삶이 더욱 찬란하게 빛나도록 하기 위해, 은총은 고난보다는 풍족함을, 각성보다는 아이다운 삶 그대로를 내어줬다. 오히려 그 과정을 통해 영혼은 몸의 성장과는 다른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장사꾼 아버지와의 인연을 끊는 날. 소송과 비난으로 점철된 생물학적 인연을 뒤로하고 프란체스코는 훌훌 떠나 비로소 신을 따라나선다. 그 길은 말로 트인 길이며 노래로 가득한 여정이다. 가난한 자의 곁으로, 자연 그대로의 축복을 따라나선 프란체스코의 선택은 단순한 기쁨에 대한 열정일 따름이며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환희로의 발걸음이다.
보뱅이 그리는 프란체스코의 삶은 시적이고 경쾌하다. 연대기처럼 거창하게 나열하는 대신 삶의 중요한 사건들에 눈을 맞추고 가볍지만 성스러운 단어들로 음률을 씌워나간다. 그래서일까. 비유와 감성으로 가득 찬 그 읊조림을 완전히 해석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하지만 굳이 해석하며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 삶의 빛나는 어느 한 장면을 담은 그림이나 사진을 앞에 두고 굳이 해석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무언가를 놓쳐가면서 읽기보다는 함께 흥얼거리며 감상하듯이 읽으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