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유시민, 돌베개, 2023)
책 내용 중에 가장 많이 나온 문장이 아닐까. 알면 알수록 과학에 빠져드는 자신을 붙잡기 위한 호소처럼 들렸다. 뒤늦게 과학을 깨달은 저자가 뿌리째 뽑히지 않으려면 주기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밖에 방법이 있겠는가.
덕분에 저자는 비로소 과학과 인문학의 두 날개로 날 수 있게 되었을까 궁금하다. 적어도 그의 반복된 고백들을 보면 분명 그 필요성은 확인한 듯싶다.
과학의 토대 위에 서야 인문학이 온전해진다.(그럴법한 이야기와 확실한 진리, 39p.)
질문은 과학적으로 하되 답을 찾으려면 인문학을 소환해야 한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인문학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127p.)
한계를 넓히려면 과학의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고, 가치를 키우려면 사실의 토대 위에서 과학이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에 대해 더 그럴법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면 과학과 인문학을 다 공부해야 한다.(후기, 292p.)
철학이라는 거대한 학문적 뿌리 위에서 마치 인문학과 과학은 별개의 줄기처럼 여겨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큰 두 줄기는 서로 꽈리를 틀듯 자라날 때 비로소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기둥이 될 수 있다.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책의 부제처럼 과학과 인문학 모두는 같은 철학적 물음에 답하기 위해 태어났고 답해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지위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과학을 공부함으로써 꽤 깊은 철학적 목적을 달성한 듯하다. 그 깨달음은 마치 불교의 교리와 비슷하고 영원론적 믿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약간 거슬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거슬린다고 하여 배척하고 환원하며 분리하는 것만은 하지 않기를. 가뜩이나 그렇게 흘러가는 세상 아닌가. 함께 꽈리를 틀지 않는 한, 존재의 뿌리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모든,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진리도, 관계도, 역할도 모두 포용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지금, 함께 하는 사람들, 함께 하는 시간과 공간,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기고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게 필요하다. 평생 인문학을 공부해 온 저자가 과학 공부의 소중함을, 두 학문의 공생을 이야기하는 목적 역시 이와 같을 터.
이 우주에는 그 무엇도, 우주 자체도 영원하지 않다. 오래간다고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존재의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각자가 만들어야 한다. 우주에도 자연에도 생명에도 주어진 의미는 없다. 삶은 내가 부여하는 만큼 의미를 가진다. 길든 짧든 사람한테는 저마다 남은 시간이 있다. 나는 그리 길지 않을 시간을 조금 덜어 이 책을 썼다. 쓰는 동안 즐거웠다. 남들과 나누면 더 좋을 것 같다. 그게 전부다.(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25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