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의 상소(이이, 홍익출판사, 2019)
연표를 보면 동호문답을 만들어 올린 것이 1569년(선조 2), 만언봉사를 올린 것이 1574년(선조7)이다. 불과 5년. 그런데 두 책의 논조는 하늘과 땅 차이다. 둘 다 왕에게 꺼릴 것 없이 직언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하지만 뜨거웠던 기대가 차디찬 실망으로 바뀌는 데에는 불과 5년밖에 걸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통치자의 5년은 짧은 것 같지만 나라를 일으킬 것인가, 망하게 할 것인가를 판가름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그 5년 동안의 역사적 배경 또한 무시할 수는 없다. 책에서는 율곡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하기 위해 그 부분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지만 그러기엔 율곡 역시 시대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 5년 동안 조선의 오랜 폐단 중 하나가 될 것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바로 '동서분당'이다. 그 부분을 설명하기 시작하면 책 한 권을 써야 할 테니 생략할 수밖에는 없다. 율곡 역시 말년에 동서 분당을 중재해 보기 위해 애를 쓴 것 또한 사실이다. 왕에게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자신과 동시대를 살고 있던 정치인 모두에게도 시선을 돌려 하나로 만들기 위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율곡의 상소 대부분의 내용은 무엇 하나 틀린 말이 없다. 오늘의 정치인들에게도 분명 필요한 덕목이자 쓴소리다. 하지만 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선조의 무능함만 탓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옳은 말도 동의를 얻지 못하면 힘을 잃는다. 율곡은 그 부분을 놓쳤다. 오늘날 되새겨봄직한 율곡의 문장들 역시 그렇다. 내 말이 맞으니 무조건 따르라는 식으로 접근하면 결국 파멸적 붕당 정치 그 이상도 이하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율곡은 사상가로서는 훌륭했지만 리더로서는 그만한 점수를 주기가 어렵겠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문장들이다.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마음에 새기되, 함께 정치하는 이들이 모두 공유하여 뜻을 같이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 주기도 바란다.
- 정치 개혁에 시기를 탓하지 마라.
-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무사안일만 좇고 진취적으로 나라를 개선하려 노력하지 않는 것은 본분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옳은 일이라면 소신을 갖고 비방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정치인들이 몸을 사리며 눈치만 보고 자신의 견해를 개진하려 않는 풍조는 결국 나라를 망친다.
- 신중하게 뽑되, 뽑은 후엔 전폭적으로 신뢰하라.
- 최소한의 생계가 해결된 다음에야 도덕적인 백성, 윤리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
- 통치하는 자의 엄정함은 공정함에서 나온다.
- 과거사를 청산하는 것이 좋은 정치의 시작이다.
- 통치 지도자는 가까이서 모시는 측근은 경계하고 올곧은 관료를 가까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