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피천득, 샘터, 2002)
인연(피천득, 샘터, 2002)
수필은 흥미를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散策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 중)
피천득 선생의 글을 보고 있노라면, 번잡하게 어지럽던 생각이 자리를 잡고 앉아 마음의 소리를 따라 귀를 기울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격정적이지도 않게 행간을 따라 흐르는 그의 글은 자랑하듯 시끄럽게 떠들어대기보다 들릴락 말락 웅얼거리는 모습을 닮은 터라 차분히 쫓아가지 않으면 금세 놓치고 말기 때문이다.
차를 우려 마시듯 읽어야 하는 글이 있다면 바로 이런 글이 아닐까 싶다. '원샷!'으로 때려 넣으며 누가 누가 더 많이 마시나 경쟁하듯 읽지 않아도 되고, 호호 불어가며 따스한 향기가 온몸에 퍼질 때를 기다렸다가 미소 한 조각을 혀끝으로 녹여 먹듯 읽으면 되니 여유롭고 편안하다.
멋있는 사람은 가난하여도 궁상맞지 않고 인색하지 않다. 폐포파립幣袍破笠을 걸치더라도 마음이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으면 곧 멋이다. 멋은 허심하고 관대하며 여백의 미가 있다. 받는 것이 멋이 아니라, 선뜻 내어주는 것이 멋이다. ('멋' 중)
술은 못 마시지만 술과 관련한 글은 책 한 권을 쓸 수 있다 하고, 옷도 세련되게 잘 입지 못하여 소위 어정쩡한 '패션테러리스트'라 하여도 해맑은 웃음으로 그 단점을 커버하려 노력한다는 그는, 진정 멋진 사람이다.
멋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크고 호탕한 말이나 행동거지보다 안에서 우러나오는 기운에서 느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청자나 백자가 딱 그 모양이다. 화려한 채색 없이도 은은한 빛깔 하나로, 고운 곡선의 아름다움 하나로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겨 살포시 내려앉게 만들지 않던가. 그 멋짐이야말로 백만금을 주어도 얻을 수 없는 내면의 멋이다.
피천득의 글이 그렇다. 소박한 단어들로 일상의 소재들을 담백하게 풀어내는 동시에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하니 그보다 멋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뜻하고 고운 글, 섬세하고 솔직한 감성, 군더더기를 다 걷어내고 온전히 보여주는 삶 속에서 지혜를 배우고 일상에 감사하는 법 또한 배우게 된다. 그의 바람처럼 '사랑을 하고 갔구나'하고 한숨짓게 된다. 그 한숨은 아쉬움이나 섭섭함, 안타까움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고마움이고, 그리움이며,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