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끝의 온실(김초엽, 자이언트북스, 2021)
기후위기를 극복해 보겠다고 과학의 힘을 이용했던 인류는 먼지(더스트)의 역습을 받아 사실상 멸망했다. 간신히 극복을 해낸 인류가 문명을 재건하고 멸망의 과거 또한 잊을 무렵, 무서운 속도로 번식하는 덩굴식물이 발견되면서 멸망했던 과거가 소환된다. 그리고 멸망기 한 귀퉁이에 존재했던 도피처와 비밀스러운 온실의 존재가 모습을 함께 드러낸다.
소설 초반의 미래 지구의 모습은 멸망기를 거쳐 온 인류의 모습이라고 보기에 너무 평온하고 온전하다. 하지만 주인공 아영을 따라 모스바나라는 덩굴식물의 특이성을 쫓으며 만난 나오미의 기억 속 멸망기 지구는 말 그대로 무법지대이자 날것 그대로의 야만성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밀어내야 했던 사람들, 밀려난 이들이 '생존'이라는 본능만으로 만들었다가 쓸쓸히 사라져 간 수많은 공동체들은 비정함을 넘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딱 하나. 온실만큼은 지키고 싶은 희망이었다. 세계의 멸망을 초래했던 실험실과 동일한 모습의 복제본 같았지만 동시에 부흥의 씨앗 역시 그 안에 움트고 있었으니까. 물론 구원이나 희생 같은 영웅적 서사가 희망을 만드는 건 아니었다. 온실을 지켰던 레이첼은 그저 식물을 있는 그대로 사랑했고 그래서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판도라의 상자 속에 몸을 숨겼던 희망은 상자의 파괴 때문에 세상에 나갔고 평범한 사람들의 손을 따라 세상을 구하게 되었으니… 이걸 과연 해피엔딩으로 봐야 하는 걸까.
세상을 구한 식물은 적응을 거쳐 세상에 녹아들었다. 그렇게 평범한 희망은 영웅적 서사에 집착하지 않고 제자리를 찾아가곤 한다. 난세의 영웅이 평시에선 간웅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절망적 현실에 날카로운 매스가 되었던 희망은 그 모습 그대로 계속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설은 그러한 평범한 희망을 그리워한다. 영웅적 서사는 오히려 일순간의 도파민,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 은은한 푸른빛처럼 내면화되어 존재하는 희망. 그것을 온전히 찾고 지키고 싶어 한다. 멀리 있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너무 멀리서, 너무 극적으로 찾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