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독서(신동호, 한겨레출판, 2025)
자존감이 곤두박질치던 2014년의 어느 날.
서울 어디쯤에 있던 그의 사무실이라는 곳을 찾아갔다.
사실 개인적인 연락을 드릴 정도로 교분이 깊진 않았다. 하지만 바닥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추락하던 내겐 어떤 동아줄이라도 필요했다. 일하던 곳에서 접했던 그의 말글이 위로와 힘이 되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용기를 내어 연락을 드린 것인데 흔쾌히 방문을 허락해 주셨다.
어색함도 잠시. 힘내라는 위로를 손으로 꾹꾹 눌러쓴 책 한 권을 내어주고 좋은 사람들과 밥 한 끼 하자며 근처 함흥냉면집으로 이끌었다. 슴슴하면서도 시원한 냉면에 소주 몇 잔이 술술 넘어간다. 그가 좋은 사람들이라 했던 이들은 이유를 묻지도 않았고, 어색하고 기계적인 인사 나눔에 힘을 낭비하지도 않았다. 그저 왁자지껄하게 서로의 사는 이야기를 나눴고 함께 녹아들었다. 시름을 잊었고 위로를 얻었다. 단언컨대 그날 같은 위로는 그전에도, 지금까지도 없었다.
이놈의 천성은 안 바뀌는지, 다시 연락을 못 드린 지 한참 되었다.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끔 대통령의 연설문을 들춰보며 흔적을 좇기만 바빴다. 연초 서점을 어슬렁거리다가 발견한 이 책이 그래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누군가의 말글을 쓴다는 것은 그 사람의 그림자 속에 나를 녹여내는 일이다. 보람도 있지만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현타가 오기도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대통령의 말글을 쓰는 사람이야 오죽할까.
물론 그의 5년은 내 생각보다 꽤나 즐겁고 의미 있었던 모양이다. 책에서 소개한 20편의 말글들은 시간이 지났어도 저마다 현재를 울리는 힘이 느껴졌다. 뒤늦게 울컥해 실제 영상 파일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또 반성하게 된다. 왜 좋은 말글은 꼭 뒤늦게 깨닫게 되는 걸까.
그래서 좋은 말글이란 시간이 흐를수록 색이 깊어지는 자기를 닮았다. 도자기를 빚는 장인의 심정으로, 진심이 담긴 말글 한 점을 완성하기 위해 수많은 페이지를 뒤적였을 그와 대통령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그때는 그 가치를 온전히 다 알아채지 못했을지라도, 약간의 오해나 아쉬움을 마주쳤을지라도 언젠가는 인정받을 날이 오리라 믿는다.
5년을 50년같이 공들이며 살았음직하다. 이젠 그의 이름을 내건 글도 많이 만나고 싶다. 2014년, 그 어느 한낮의 왁자지껄한 점심처럼 자유롭고 위로가 되는 글을 또다시 기대해 본다.
<귀퉁이 접어가며 갈무리한 말들>
당신이 주머니나 가방에 책을 넣고 다니는 이유는 불행한 때에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다른 세계를 갖고 다니는 것과 같다. - 오르한 파묵, <다른 색>, 1999.
청와대에 들어가 '누리고 살지 않았느냐'며 나에게 비아냥댄 친구가 있었다. 그저 시기심일 거라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며칠을 끙끙 앓았다. (중략) 청와대에서 일하는 동안, 국민을 매우 두려워하며 권력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여기면서 일한, 바보 몇이 있었음을 고백하고 싶다. (p.188~190)
기성세대가 보수든 진보든, 청년에게는 모두 도전의 대상이다. 청년이 보수든 진보든, 한 세대 안에서 서로 다투며 조화를 이룬다. 오히려 이들을 가르는 것은 기성세대의 정치적 기대일 뿐이다. (p.305)
다시 책 읽는 대통령을 기다린다. 민주주의 그렇듯, 다양한 생각이 자신 안에서 논쟁을 벌이는 일은 늘 즐겁다. 다시 책을 들고, 나와 다른 생각과 겨뤄보고 싶다. (p.347~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