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판타지아(주얼, 이스트엔드, 2024)
현실이든 환상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이 순간을 믿는 거예요. (중략) 그러면 당신의 이야기가 되니까. (p.34/당신의 판타지아)
햇빛은 공짜고 누구에게나 공평한 줄 알았는데, 그곳에선 그렇지가 않았어. (중략) 가난하면 햇빛을 얻기 위해 다른 걸 포기해야 해. (p.47/경수의 다림질)
인간의 선함과 용기를 믿자고. 아무리 연약할지라도 이 이상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바로 그것뿐이니까. (p.140/이상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상실, 부재, 그리고 극복.
잃어버렸거나 애초부터 갖지 못했던 것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보통 절망하고 만다. 그리고 그 절망을 딛고 다시 올라오기 위해서는 무엇이 되었든 모먼텀이 필요하다. 현실적인 것이든, 환상적인 믿음이나 각성이 되었든 상관없다. 나의 내부에서 비롯되어도 좋고 외부의 자극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도 나쁠 것 없다. 무엇이라도 단단하고 확실한 디딤돌이 될 수만 있다면 그것은 극복의 한 점으로써 나를 다시 위로 밀어 올려줄 것이다.
6편의 이야기는 저마다 상실과 부재를 마주한 주인공이 어떤 환상적인 계기를 통해 극복의 한 점을 찍거나 찾는 구조로 전개된다. 작가나 연기자로서의 꿈을 주저하는 순간에 맞이한 환상적인 조우(당신의 판타지아, 순간을 믿어요)나, 집착과 분노의 끝에서 마주한 또 다른 포기와 전환이 오히려 극복 포인트가 된다는 반전(경수의 다림질, 키클롭스, 이상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곰팡이)이 그것이다.
포기에의 유혹, 집착할 수밖에 없는 현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픔을 판타지적 요소로 어루만지고 극복의 한 점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은 소설적 장치로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위로와 격려로 가는 길은 조금은 낯설다. 약간은 갑작스럽고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하다.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발밑에 툭 던져지는 느낌이랄까. 생각지도 못한 레드카펫이 내 앞에 깔릴 때의 기분이다. 선택할 여지, 준비할 시간을 조금은 더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긍정적인 용기와 격려를 주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의 진심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잠깐의 낯섬도 이내 따듯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진심. 그 진심에 내 안의 어떤 단단한 믿음도 살짝 예열되는 느낌이다. 그게 극복을 위한 씨앗 아닐까. 희망이라는 이름의 씨앗 말이다. 모든 씨앗이 그러하듯 그 안에는 온갖 판타지가 '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담겨 있을 터. 그 가능성이 어떻게 발아할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그저 기대하는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다.
내 안의 판타지아에 노크해 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