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축 소멸 사회(이관후, 한겨레출판사, 2024)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회, 이런 곳에서 희망을 갖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지극히 한국적인 자살률과 출생률' 중에서)
대한민국이 소멸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먼저 정치가 소멸했기 때문('정치가 소멸하면 나라도 소멸한다' 중에서)
자살률 1위, 출생률 꼴찌.
각종 정책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지만 결국 소멸의 길에 접어든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압축성장의 찬란한 신화를 만들어낸 대한민국답게 소멸의 속도 역시 빠르고 가파르다.
극적인 반등은커녕, 속도를 줄이는 것조차 빠듯해 보이는 것은 과연 나만의 착각일까.
10%만을 위해 존재하는 입시와 일자리, 비전이나 정책의 차별화 없이 서로 심판과 처벌에만 몰두하는 정치, 날로 심각해져 가는 기후위기 속에서도 코앞에 놓인 이익에만 몰두하는 사회가 과연 반전 포인트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저자의 여러 비판과 지적에는 깊이 공감한다. 하지만 '희망의 회복', '정치의 복원'이라는 원론적 마무리는 그래서 더욱 아쉽다.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결론이 없다. 막연히 국민이,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외침은 별 의미가 없다. 답답하고 화가 나서 국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끌어내려도 봤다. 새로운 정부에 많은 힘을 몰아주고 기대와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불과 5년 만에, 끌어내려진 대통령을 배출했던 정당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그마저도 불과 3년 만에 또다시 끌어내려졌다. 이 또한 압축적이고 드라마틱한 변화다.
그런데 그러는 사이, 우리 삶은 과연 조금이라도 나아졌을까. 솔직히 그렇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희망을 갖자, 희망을 만들자 하는 것은 고문이다. 무책임이다.
절실한 당사자에게 가 닿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실용을 표방하고 성과로 평가받겠다고 말한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이건 희망이나 기대를 걸어서가 아니다. 정말 살고 싶어서다. 살아야 하니까. 내가 살고, 내 아이가 살아야 하니까. 압축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뭘 바꿔달라는 것은 아니다. 그걸 기대해서도 안된다. 또 다른 압축 회복은 그만큼의 부작용을 필연적으로 낳을 것이다.
시간을 좀 갖더라도 천천히 차근차근 근본적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그 확신이라도 주길 바란다. 그러면 국민은 믿고 간다.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당위성으로 보여주길, 진심으로 바란다.